매일성경 47

QT. 때를 따라 아름답게 (전도서 3:1-15)

인생사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탄식을 하며 삶의 지혜를 깨친 전도자는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은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지식과 희락에 감사하고 죄를 지으면 노고를 주신다는 것을 알고 이 땅에서 금방 없어질 것에 연연하지 말고 가난하고 약한 이웃들을 돌봐 하늘에 없어지지 않을 재물을 쌓으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깨달으면 사람이 마음먹은 것만큼 되느냐? 아닙니다. 그것 또한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그 이유는 모든 것을 지으실 때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때를 모르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고 수고함으로 낙을 ..

QT. 삶은 선물입니다. (전도서 2:18-26)

QT. 삶은 선물입니다. (전도서 2:18-26) 모든 것이 헛되다고 지금까지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랍니다.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는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매일성경의 해설을 보겠습니다. 전도자는 의미 없고 하찮아 보이는 반복적 일상에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선물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선물해..

QT. 즐거움도 헛됩니다. (전도서 2:1-11)

QT. 즐거움도 헛됩니다. (전도서 2:1-11) 지혜가 헛되다가 하던 전도자는 이번에는 즐거움도 헛되다가 말합니다. 무슨 즐거움인가 보았더니, 술 마시기, 집짓기, 포도밭 가꾸기, 과수원 만들기, 연못 만들기, 노비 늘리기, 소와 양을 떼로 키우기, 은과 금과 여러 보석을 쌓아 두기, 가무에 능한 연예인을 부르기, 처첩 늘리기입니다. 이 모든 것을 전도자는 자기 수고로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로 생각해보니, 이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청춘이라고 불리던 시절, 뭐 그리 화려한 것도 지금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젊은 시절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자신감으로 찼던 시간도 있었고 실망의 나날을 보냈던 기억도 납니다. 기쁜 순간은 어찌 그리 짧..

QT. 지혜의 한계(전도서 1:12-18)

QT. 지혜의 한계(전도서 1:12-18) 스님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부담감이 스멀스멀 다리를 잡습니다.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좋은데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 내가 어떻게 마음을 다잡느냐 하는 것에 좌우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는 인간을 얘기하면서도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해탈을 꿈꾸는 일은 버거운 일입니다. 성경의 하나님도 다른 것은 없습니다. 오늘 전도서에서는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일을 연구하며 살핀 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

QT. 마지막을 기다리며(다니엘서 12:5-13)

마지막을 기다리며(다니엘서 12:5-13) 다니엘이 마지막으로 본 환상에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다니엘이 궁금한 것을 환상 속의 한 사람이 묻습니다.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좋은 시절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불행이 내일 몇 시에 끝날 것인지 궁금합니다. 행운은 지속되길 원하고, 불행은 곧 끝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지요. 수많은 왕조를 지켜본 다니엘은 흥망성쇠는 언제나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음에도 궁금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기약이 없다는 답은 사람들의 허벅지에 힘을 빼서는 주저앉게 만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런 답이 나왔을 것입니다.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

전도서를 공부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지혜 1. (송민원, 성경과설교연구원)

전도서는 어떤 지혜서인가요? 11월의 매일성경 QT가 다니엘서였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역사를 공부한 느낌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 넘치면 하나님이 환상을 통하여 미래를 알게 하시는 것이 주술적으로 보였습니다. 한때 들었던 내용이 기억납니다. 불경을 공부하고 도를 깨우치려고 수도를 하면 어느 순간 가벼운 깨우침이 생긴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사람들의 전생이 보인다고 하고, 어떤 분은 남의 사주와 팔자가 보인다고 합니다. 왜 절에 가서 미래를 물어보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이 만나시는 스님들이 그런 분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스님들은 이런 깨우침을 경계한다고 합니다. 점파치나 하는 짓이라는 것이지요. 다니엘의 신실함은 어느 수준이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11월 마지막 주는 전도서로 QT를..

QT: 땅의 안식과 남은 자의 괴로움, 레위기26:27-39

QT: 땅의 안식과 남은 자의 괴로움, 레위기26:27-39 너희가 원수의 땅에 살 동안에 너희의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주하는 동안 너희가 안식할 때에 땅은 쉬지 못하였으나 그 땅이 황무할 동안에는 쉬게 되리라(레위기 26:34-35절) 성경은 한 저자에 의해 일관성을 가지고 쓰인 책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구약도 그렇고 신약도 그렇다지요. 바울처럼 저자가 분명한 편지글이 정경으로 인정되기도 했지만 다른 성경(?)은 정경에서 제외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의 일관성 때문이었겠지요? 구약의 경우는 저자가 분명하지 않다고 배웠습니다. 저는 구약을 묵상하면서 다신교 사회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일신교 유대인들이 왜 불신의 늪에 빠지는..

QT.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히브리서5:11-6:8

QT.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히브리서5:11-6:8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브리서 6:4-8) 히브리서 저자는, 복음이 주는 선물을 경험하고도 복음을 버리고 돌아서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받는 큰 죄를 짓는 것이기에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며 무섭게 경고했습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배우며 성장하지..

QT.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히브리서4:1-13

QT.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히브리서4:1-13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브리서 4: 7-10) 하나님이 주신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어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복음을 듣는 자가 자기의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아서 그렇다면서 위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와 같이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때에도 구원(안식)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는 성경의 말..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은 요나가 요구한 정의와 공평과는 다르다(송용원목사, 매일성경,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은 요나가 요구한 정의와 공평과는 다르다 (송용원목사, 매일성경,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이라면’) 제가 과거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이유는 선민사상에 절은 유대인들의 종교에 터 잡아, 유대민족들이 믿는 민족종교를 세계 종교라고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평과 정의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이 구약에서 볼 때와 신약에서 볼 때 도저히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죠. 구약에서 하나님은 때로 유대민족을 벌하시지만, 이민족을 핍박하고 압제하는 것이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는 이제부터는 세상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직접 만나주시고 구원도 주시겠다고 하니 ‘이게 뭐지?’ 뻥찌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