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27

마지막 이야기들.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문학동네 간행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시겠습니까?” 회사 사장에게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안 갑니다. 그 시절의 가난을 다시 겪고 싶지 않습니다.”저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사장보다는 적은 재산이지만 같은 대답과 함께 추가로 이유를 하나 더 들 것입니다.“쫓기듯 경쟁하며 살았던 젊은 시절로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과거 젊은 시절 조그만 차이라도 민감하게 느끼고 뒤처지지 않으려 노력하던 세태는 지금을 사는 젊은이들이 더 심하고 험해 몹시 각박해 보입니다. 경쟁하는 삶에 지친 젊은이들이 자기만의 가치관을 찾아 새롭고 남다른 길을 걷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젊은이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 때는 처세술 책이 유행을 했습니다. 처세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것으로 착각했..

매일 에세이 2025.06.02

H마트에서 울다. 미셀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문학동네 간행.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얼굴보고 같이 살면서도 저는 아내의 마음,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읽지 못했습니다. 소설을 읽고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읽어낸다고 믿었지만, 책은 책이고, 생활은 ‘따로’였습니다. 아내는 지쳤습니다. 간혹 제가 바뀌지 않았냐고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실망스럽습니다. “뭐가 바꼈다는 거야?” 말투도 눈총도 무섭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라고 자격 시험을 치르고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닙니다. 자격 시험을 치렀다고 해서 무어 그리 달라지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아무 생각도 없이 아이를 낳으면 사랑으로 키울 것이라는 막연한 결심만으로는 육아의 현실은 냉엄합니다. 제가 클 때 부모로부터 매도 맞았습니다. 가난에 찌든 부모가 무슨 마음의 여유..

매일 에세이 2024.09.23

대성당(CATHEDRAL).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문학동네 간행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을 계속해서 읽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지루한 듯 지루하지 않고 세상 여기저기에서 늘 일어나는 흔한 이야기인 듯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여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검색해 보기도 합니다. 소설책이 따로 정답지를 책 뒤에 준비한 수련장이 아니기에 사람들의 의견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세상사라는 것이 사람들이 얽혀서 만들어지니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소설 읽기를 권합니다.   요즈음이야 성형수술이 워낙 발달해서 어머님 날 낳으시고 선생님 날 고치시니 아이를 갖는다는 것에 부담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태어나서 성형이 가능한 나이가 될 때까지 곁에 두고 늘 봐야 하는 아이가 기왕이면 예쁘면 좋..

매일 에세이 2024.07.18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소설. 문학동네 간행

붓다는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첫 번째 화살에 비유했습니다. 첫 번째 화살을 뽑을 생각을 않고 어디서 날아온 화살인지, 누가 쏘았는지,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당해야만 하는지 따지다가 다시 맞는 화살을 두 번째 화살이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화살을 맞으면 즉각 화살을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두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있고 즉각적으로 기쁨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소개한 내용입니다. 우울을 이기는 방법을 알려주는 내용으로 가득한 소설집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는 평범하며 이 평범함은 놀라울 정도로 설레며 기쁜 마음으로 가득하다고 설명합니다. 소설은 소설로 이어지거나,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평범한 미래를 설명합니다. 가장 마지막이 가장 기쁘다는 미래에 대한 전도서입니다. 첫 ..

매일 에세이 2024.03.18

하얼빈, 김훈 지음. 문학동네 1

초라한 먹물들. 지워진 기억 속의 이 씨 왕가 국권을 상실하고 나라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아무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어느 줄에 서야 목숨을 부지하고 나아가 부귀와 영광을 가질 것인지 골몰하였지요. 나라의 임금이 황제가 되었다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붙이는 것도 허황한 짓이었습니다. 만약 임금과 신하들이 겉으로는 힘에 굴복하면서도, 뒤로는 항쟁과 독립을 위한 지원을 했더라면, 국권은 회복이 되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추억으로 그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고, 아관으로 파천을 하는 일들이 무지막지한 일본에 대한 항쟁으로 기록되는 것이 황탄한 말이고 황잡한 말입니다. 말은 시간을 넘어 건너가지 못하고 책 속에서 ..

매일 에세이 2023.05.04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장편소설, 문학동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장편소설, 문학동네 “사람과 사람사이에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241쪽) 어머니에게서 버려져 해외로 입양을 간 아이가 자기를 낳았던 엄마의 땅, 진남에서 어머니를 똘똘 묶고, 얽었던 이야기를 찾아가는 소설입니다. 타인을 오해하여 미워하고 그래서 비극과 슬픔을 품고 뱉어내는 이유가 사람과 사람사이에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 때문이라고 작가는 주장하는 듯합니다. 심연을 건널 수 없다는 절망이 사람에게는 없는 날개를 희망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가질 수 없는 희망은 고문입니다...

매일 에세이 2023.04.25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장편소설, 문학동네 간행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장편소설, 문학동네 간행 소설의 문체가 힘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야기가 힘이 있는 것인지, 글을 읽으면서도 일자목이 주는 통증에 목을 의자에 기댄 채 책을 높이 들어 읽고 있음에도, 책을 쥔 손목에 힘이 잘 빠지지 않았습니다. 읽는 내내 힘을 얻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기분 요즘 잘 느끼지 못했던 든든함입니다. 책 속, 작가의 사진에서 좌우로 헝클린 듯한 머리 모양이 자유분방한 소설 속 주인공이 생각났습니다. 누구도 머리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시비 걸지 않을 가족들의 모습을 상상하라고 고른 사진은 아닐까 잠깐 엉뚱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심시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로부터 가지가 뻗은 족보가 ‘심시선 가계도’라고 먼저 소개를 하면서 글은 시작합니다. 빌려온 책이라 직접 책에는 ..

매일 에세이 2023.04.14

자전거 여행 1.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문학동네 간행

도서관에서 책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마음을 먹고 돋보기안경을 챙겨야 그나마 조금 수월합니다. 4단 정도의 낮은 서가에서 작은 글씨로 쓴 도서분류목록을 읽어내는 것은 굳은 근육도 쉽게 허락하지 않아, 엉거주춤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관심도서목록에서 책의 위치를 확인하는 메모지를 출력하여 2층으로 올라갈 때는 책을 쉽게 찾을 것 같아서, 돋보기안경도 없이 올라가지만, 한참을 헤매다 끝내 원하는 책을 찾지 못하고 마음을 돌려 먹었습니다. 서가를 여행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책을 고르겠다고요. 제 기억 만으로도 제목만 보면 쉽게 읽고 싶은 책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은 10분이 지나고 눈이 침침해지면서 스러져갔습니다. 지쳐 돌아서는 눈길에 보이는 책, 그래서 서가에서 뺀 책이 ‘자전거 여행 1..

매일 에세이 2023.04.10

아직 멀었다는 말. 권여선 소설. 문학동네 간행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다며 달려드는 사람을 보는 것이 힘듭니다. 일식집에서 보지만 회를 뜬 살을 뼈만 남은 몸에 올려놓아도 한동안 생선은 입을 벌리며 통증을 못 느끼는 듯합니다. 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도 살이 분리된 체 숨 쉬는 생선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상추로 얼굴을 덮기도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편할까요? 고통은 생존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고통은 위험을 회피하는 수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진화론적 설명은 빼고 다시 묻습니다.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편할까요? 권여선 작가의 소설은 읽기가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우리가 만든 차별, 모욕, 불공정, 부당함, 불평, 불의, 폭력, 야비함에서 시작된다는 ..

매일 에세이 2023.01.17

허구의 삶. 이금이 장편소설. 문학동네 간행.

모지리 어른들의 폭력에 아이들이 죽어나갑니다. 작가의 말에서 인용합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존중받거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아이는 자라서도 외피만 어른일 뿐 내면엔 상처 가득한 아이가 들어 있는 가엾은 존재다.” 이금이 작가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일 것 같습니다. 부모는 낳고 기른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아이들이 귀하다고 생각하고요. 귀하다는 것은 소중하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고, 소중하니 잘 키우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을 이어도 아이들을 존중했다는 답은 쉽게 나오지 않네요. 존중하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주의를 해야 함에도 부모는 쉽게 말로 상처를 주고, 함부로 행동을 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부모를 이해해서 상처 ..

매일 에세이 2022.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