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880

휴먼 스테인 1. 필립 로스 장편소설. 박범수 옮김. 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19

전집에서 고른 책을 읽은 것이 아주 오래전입니다. 아버지께서 계몽사에서 발행했던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없는 돈을 털어 책을 좋아하는 제게 월부로 사서 주셨습니다. 모두 50권으로 된 전집이었습니다. 그때가 중1이었는데, 다 읽은 책들을 버리지 못해 고등학교까지 가지고 있다가 외삼촌이 어린 조카에게 주고 싶다고 해서 삼촌이 갖고 계시던 세계명작전집과 바꿨습니다. 삼촌과 교환한 세계명작전집은 아직도 제 서가에 꽂혀 있습니다. 종이를 아래위 두 칸에 나눠 세로로 인쇄된 두껍고 오래된 책입니다. 두 전집 모두 다 읽었습니다. 제가 그 뒤로 ‘세계명작’을 보지 않은 것은 두 전집 때문입니다. 그 뒤로도 간혹 단행본으로 출간된 두 권(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혹은 세 권짜리(전쟁과 평화) 소설을 읽기도 했지만 드물었..

매일 에세이 2025.04.01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칼 세이건 강연집. 앤 드루얀 편집. 박중서옮김. 홍승수 감수

아이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아내가 가고 아내를 따라 제가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신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불편했던 젊은 시절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숱한 세상사를 만납니다. 운칠기삼이 단지 노름판의 격언이 아니라면 신의 도움을 받아 사는 것이 비난받을 일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을 준비하게 하셨다”는 순장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죽음의 문턱일 수도 있었던 삶의 고비가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못했거나, 지금의 나조차도 될 수 없었을 가능성의 고비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동생이 갑자기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믿음은 믿음을 기반으로 큽..

매일 에세이 2025.03.31

불편한 편의점. 김호연 장편소설. 나무옆의자 간행

한길 건너 편의점이 있습니다. 구멍가게라 불리던 아주머니 할머니가 지키던 가게들이 모두 대기업이 운영하는 편의점의 간판을 걸고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노름판에서는 돈 많은 놈이 이깁니다. 구멍가게가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는 대한민국에는 편의점이 말 그대로 편의를 제공하며 즐비합니다. 서로 가까이 붙어 경쟁하는 편의점이 우리를 편하게 해 줄 것입니다. 편해야 할 편의점이 “불편”하다니 읽기가 불편합니다. 그래서 ‘편한 편의점’부터 먼저 얘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책이 얘기하는 “불편한 편의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편의점에는 손님들이 찾는 상품을 모두 갖춰야 합니다. 도시락을 예로 들면 박찬호 도시락도 있어야 하고 산해진미 도시락도 진열되어 손님들이 자유롭게 선택..

매일 에세이 2025.03.26

화성 연대기. 레이 브레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현대문학 간행

집에서 새는 바가지 들에서도 샌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구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화성살이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을 하려고 속담을 가져왔습니다. 지구살이에서는 힘이 있으면 달려들어서 뺏는 짓이 미덕입니다. 제국주의 역사는 폭력과 약탈이 일상이었습니다. 네덜란드가 해상권을 장악하더니 스페인으로 영국으로 패권이 넘어갔고 결국에는 미국의 패권이 지구살이를 좌지우지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명실상부했던 식민지들이 독립을 하면서 식민지가 사라진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패권국에 꼼짝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독립국의 왜소함이 도드라지는 오늘입니다.   화성인들은 처음 방문한 지구인들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탐험을 목적으로 온 지구인들의 다음 행보는 집단 이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

매일 에세이 2025.03.24

악몽을 파는 가게 2. 스티븐 킹 단편선. 이은선 옮김. 황금가지 간행

스티븐 킹의 말입니다. “‘장르’라는 단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나는 공포 소설을 좋아한다. 그런가 하면 탐정 소설,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 바다 이야기, 순수 문학, 기타 등등도 좋아한다” (314쪽) 작가가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다.  악몽을 파는 가게는 ‘악몽’이라고 하니 공포 소설에 속하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악몽에는 ‘기타 등등’이 숨어 있습니다. 생활고에 지쳐 아이들과 함께 동반자살을 하는 이야기에는 칠순이 넘은 노인들의 삶이 같이 등장합니다. (허먼 워크는 여전히 건재하다) 죽음은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 생각나면서 사회가 보호하지 못한 사람들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악몽은 무엇일까 마음이 복잡합니다.  죽은 아내를 보내지 못하고 공동주택 안에 시신을 ..

매일 에세이 2025.03.20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장편소설. 박소현 옮김. 다산책방 간행

벌써 먼 옛날이 된 듯한 3년 전, 개인적으로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던 시절을 느꼈던 사건들이 몇 있었습니다. K-POP이 세계 여기저기에서 불리고, 그들이 공연하는 곳에서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언론이 난리였습니다. 드라마부터 챙겨보고 책을 읽었습니다. 문학적인 면에서는 파친코에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에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김민하 배우의 연기를 보며 지독한 일상을 꿋꿋이 살아내는 끈질김에 감탄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김민하 배우는 그 후 '조명가게' 드라마에서 다시 봤습니다. 다시 보니 반가왔습니다)  근대의 굴곡진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디 한 분야라도 빠짐없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

매일 에세이 2025.03.19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 강 시집. 문학과 지성사 간행

제가 사는 동네는 선거방송용 그래픽에서 빨갛게 물든 지역입니다. 수도권이건만 그렇습니다. 40이 갓 넘은 친구가 동네가 마음에 안 든다며 요즘은 더욱 불안하다는 심정을 전했습니다. 윤의 탈옥을 도운 세력이 도처에 암약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이웃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진 것입니다. 미니시리즈 중에 첫 한두 회는 재미있다가 갈수록 지루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요즈음의 시국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누가 더 불안할까 생각해 보면 본색을 드러내면서 점점 조여 오는 올가미에서 탈출하려는 행동을 보이는 쪽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윤의 탈옥을 도운 쪽이 쫀다는 말입니다. 걱정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더 쫄리겠냐? 걱정하지 말자”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세상 걱정을 안고 살지는 않습..

매일 에세이 2025.03.17

악몽을 파는 가게 1. 스티븐 킹 단편선. 이은선 옮김. 황금가지 간행

단지 유령이 나오고 악령이 나오고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무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유령이 나와 닮았고, 악령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고, 귀신이 낯이 익으면 무서운 이야기가 됩니다. 인간 내면에는 여러 인간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저 그런 이야기로 듣다가 어느 날 문득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교교한 달빛 아래, 느티나무 그림자 밑에서 숫돌에 칼을 갈아 칼날이 설 때처럼 시퍼렇게 살아나면 보고 싶지 않은 다른 나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그게 유령이고 악령이고 귀신이라는 생각이 들 때 무서운 이야기가 됩니다.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읽고 비가 오는 밤마다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지나 집으로 와서 매번 반복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늘 밤도 카페에서 술집에서 길바닥 시위장소에서 반복해서 들려옵니다...

매일 에세이 2025.03.14

우리가 우주에 가야 하는 이유. 폴윤(윤명현) 지음. EBS BOOKS 간행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상식이 조금은 필요합니다. 빅뱅과 암흑물질, 암흑에너지, 가시광선 망원경 허벌과 적외선 망원경 제임스 웹의 차이, 별의 생성과 소멸 과정 등등, 우주 현상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상식의 습득 과정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공룡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는 모습을 본 저로서는 공룡 이름을 외우는 것보다는 쉬운 듯합니다. 우주에 대한 기본적 개념의 이해만 있으면 논리적인 설명들을 이해하는 데 암기가 많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상식과 흥미를 유발할 정도의 지식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많이 알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주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으로 지식과 상식의 차원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우..

매일 에세이 2025.03.11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창비 간행

요즘은 출신지가 어디냐 묻지 않습니다. 차별이라는 서리가 몸을 도사리게 하니까요. 서울에 와서 살면서 이제는 부산에 가면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 게 식당의 소란입니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앞에 앉은 일행과 이야기를 하려면 할 수 없이 목청을 높여야 합니다. 옆자리의 사람들도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그러니 식당 안은 더욱 소란합니다. 영화관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면 줄줄이 뒷사람이 일어나는 현상과 유사한 일이 식당에서도 존재합니다.  서울에서도 간혹 시끄러운 식당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끄러운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유독 시끄러운 말은 사투리일 경우가 많습니다. 전국 팔도 사투리가 들려서 시끄러운 게 아닙니다. 가슴 뿌듯한 고향 사랑이 짙게 뵌 사투리, 우월감에 젖은 사투리, 기득권을 가진 사투리만이 들..

매일 에세이 2025.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