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 11

최영미, ‘시를 읽는 오후’ 중 두 시인의 시를 보며 든 생각 하나.

최영미, ‘시를 읽는 오후’ 중 두 시인의 시를 보며 든 생각 하나. 선거가 끝난 후, 아직도 뉴스를 보기가 싫습니다. 최선의 인간들은 신념을 모두 잃었고, 최악의 인간들은 강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떠들어대는 믿기 어려운 말들이 싫어서입니다. 우리는 정치에 민감한 국민입니다. 독재권력이 휘두르는 방망이에 매 찜질을 당하고 입을 봉했던 내 젊음의 거짓된 나날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서슬 퍼런 권력이 백주 대낮, 햇빛 속에서 잎과 꽃들을 마구 흔들었지만; 구부러지더라도 부러지지 않아 이제 나는 진실을 찾아 시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권력의 하수인의 꾐에 빠져 그대가 우리 깊게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에 다른 이들이 내 친구가 되었으나; 그래도 내가 죽음에 직면할 때나, 잠의 꼭대..

매일 에세이 2022.05.06

시를 읽는 오후, 최영미 지음, 해냄 출판

시를 읽는 오후, 최영미 지음, 해냄 출판 인간을 파괴시키려거든 예술을 파괴시켜라. 가장 졸작에 최고 값을 주고, 뛰어난 것을 천하게 하라.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문장이랍니다. 글을 써서 먹고살기를 희망하던 시인은 블레이크의 통찰에는 공감하면서도 문단의 아웃사이더인 본인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여간 마음에 금이 간 사람들은 긁어댔던 사람들과는 달리 상처가 쉽게 낫지 않습니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지만, 때린 놈은 못 잔다’는 옛 속담은 들었을 당시에는 그럴듯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때린 놈을 비난하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백 번을 양보해서 어쩌면 옛날에는 사람들의 양심이 살아있어 혹여 때리고는 후회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돈 주고 때리고, 때리..

매일 에세이 2022.05.02

최영미 시집, 돼지들에게. 이미출판사2

시란 게, 언어를 갈고닦아 영롱한 빛을 내게 하고, 의미를 욱이고 채워 탁하면 억하고 알아먹어야 함에도 능력이 되지 않아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이해가 될 듯한 시를 만나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따라 하고 싶어지고 말을 붙여 보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반가움을 표시하고, 응원을 하고 싶어서 주접일지도 모를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할 일입니다. 레이몬드 카바를 읽고 목욕을 하고 나는 다시 나의 의자에 앉아 눈 덮인 겨울나무 가지 위에 부지런히 눈을 터는 새를 본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멀리서 빛나고 당신을 위해 나는 이 시를 억지로 완성하지 않으리 (대화 상대, 마지막 두 연, 43쪽) 내가 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시간은 수많은..

매일 에세이 2022.03.26

최영미 시집, 돼지들에게. 이미출판사

최영미 시집, 돼지들에게. 이미출판사 시란 게, 언어를 갈고닦아 영롱한 빛을 내게 하고, 의미를 욱이고 채워 탁하면 억하고 알아먹어야 함에도 능력이 되지 않아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이해가 될 듯한 시를 만나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따라 하고 싶어지고 말을 붙여 보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반가움을 표시하고, 응원을 하고 싶어서 주접일지도 모를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영혼이 우리가 미워했던 육체를 이기리라(쪽 표시 없는 9쪽) 우리가 사랑했던 육체는 우리가 미워했던 영혼을 고치지 못한다. 누가 누구를 정리했다고? 지금 뒤에서 수근대는, 앞에서 염탐하는 당신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끝나지 않았어. 이건 리허설이야..

매일 에세이 2022.03.26

시 따라 걷는 생각 7(오늘은 두 편의 시 아니 세 편)

시 따라 걷는 생각 7(오늘은 두 편의 시 아니 세 편) 원고 청탁 최영미 시인 시 2편 달라는 메일을 받고 세수도 하지 않고 세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고 계량기 교체하느라 단수한다는 안내방송도 듣지 못하고 시간의 마우스를 이리저리 옮겨 이미 여러 번 우려먹은 기억을 재활용하느라 새벽부터 엉덩이 붙이고 앉아 브런치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는데, 10분 전인데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어떤 사랑의 묘약이 이보다 독하랴 데이트 약속만 떠올려도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그녀를 만난다는 것이 꿈만 같다. 독사진이 없어 무리 속에 찍힌 사진을 보며 흐릿한 얼굴을 보정한다. 너무 예쁘다. 예쁜 이 여자와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에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운동하지 않아도 심장이 고동친다. 사랑은 묘약이었다. ..

매일 에세이 2022.01.07

시 따라 걷는 생각 6

시 따라 걷는 생각 6 죽음은 연습할 수 없다 최영미 시인 -그해 여름의 문자메시지 아버지 위독하시대 아버지 운명하셧다 (맞춤법이 틀려도 그냥 넘어갔다) 영정사진 갖고 병원 장례식장으로 와 아버지 주민등록 주소 좀 알려줘 빨리 엄마랑 통화했어 아버지 세례명 요한 천주교 식으로 장례 치르지 말래 안치료 20만 입관료 20만 음식값 기본 50만 상복 대여비 2만 수의 38만 관 25만 운구비 40만(기사 팁 포함) 화장비 10만 유골함 3만 꽃값은? 계산은 나중에 하자 아무도 원하지 않는 아버지의 피 묻은 틀니를 가져가려는 자식이 없어 무슨 전염병 만지듯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80이 되도록 젊은이처럼 단단하던, 당신의 자랑이던 몸이 뜨거운 재가 되기까지 40분도 걸리지 않았다 상속포기 서류..

매일 에세이 2022.01.05

시 따라 걷는 생각 5

시 따라 걷는 생각 5 괴물 최영미 시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나는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30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 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

매일 에세이 2022.01.04

시 따라 걷는 생각4

시 따라 걷는 생각4 마법의 시간 최영미 시인 사랑의 말은 유치할수록 좋다 유치할수록 진실에 가깝다 기다려찌 어서와찌 만져줘찌 뜨거워찌 행복해찌 유치해지지 못해 충분히 유치해지지 못해 너를 잡지 못했지 너밖에 없찌, 그 말을 못해 너를 보내고 바디버터를 덕지덕지 바른다 너와 내가 함께 했던 마법의 시간으로 돌아가고파 망고와 파파야 즙을 머리에 바르고 올리브오일로 마사지하고 싱그러운 페퍼민트와 장미꽃 향으로 중년의 냄새를 덮고 어미의 병실에서 묻은 기저귀 냄새도 지우고 기다려찌 너밖에 없찌 젊은 날,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러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남들이 “미친 놈”하고 조롱했다. 조롱이 무서워 개그 프로그램에서만 즐겼다. 나 예쁘찌? 나 좋찌? 실실 조롱하듯 웃으면서 속으로는 부러웠다. 그냥 그렇게..

매일 에세이 2021.12.30

시 따라 걷는 생각3

시 따라 걷는 생각 3 꽃들이 먼저 알아 최영미 시인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나지 않을 거야 나비가 날아든다는 난초 화분을 집 안에 들여놓고 우리의 사랑처럼 싱싱한 잎을 보며 그가 말했다 가끔 물만 주면 돼. 물, 에 힘을 주며 그는 푸른 웃음을 뿌렸다 밤마다 나의 깊은 곳에 물을 뿌리고픈 남자와 물이 말라가는 여자의 불편한 동거 꽃가루 날리는 봄과 여름을 보내고 첫눈이 오기 전에 나는 그를 버렸다 아니, 화분을 버렸다 소설을 쓴답시고 정원을 배회하며 화분에 물 주기를 잊어버렸다 꽃들이 더 잘 알아.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난초 화분 옆에서 시들시들 떨어진 꽃잎을 주우며 그가 말했다 얘네들이 더 잘 알아.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시들지 않을 거야 먼저 버..

매일 에세이 2021.12.27

시 따라 걷는 생각2

시 따라 걷는 생각2 시(詩) 최영미 시인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전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 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의 한 문장으로 똑떨어지는 고독이 아 니라 사람 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매일 에세이 2021.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