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따라 걷는 생각 5
괴물 최영미 시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나는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30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 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이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미투운동 확산에 불을 댕긴 총구 중 하나로 평가되는 원로시인 고은 씨의 성추행 의혹이 2심 재판부에서도 고은 시인 패소로 결판났다. 1,2심 모두 이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 시인 완승이다. 이로 보아 대법원으로 설혹 이 사건이 간다 해도, 1,2심 판결이 뒤집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2019년 11월 8일 구글뉴스)
우리 사회는 지금도 잔재가 남았지만, 학벌과 인맥으로 능력을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게 잘 통하지 않는 곳이 충무로라 해서 난 영화인들을 좋아한다. 영화 잘 만들면 되지, 무슨 학력이 중요하랴. 아이들 보조강사 하려고 해도 석사니 박사니 스펙을 강조하는 곳이 학교다. 학사보다는 석사가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석사보다는 박사가 낫다는 편견이 생긴다. 그러니 너도 나도 간판 하나 걸려고 대학원에 들락거린다. 스펙 좋은 선생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더라.
시는 시인의 정신이다. 정신이 썩었는데, 그 시가 정상일리 있을까? 딸랑거린 사람들은 훌륭한 시와 음탕한 시인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을까? 혹 원로라서, 노털상 후보라도 된다고 해서?
우리는 먹고살려고 눈치 보고, 슬쩍 손모가지를 내주는 경우도 있다. 주물덩거려도 한두 번은 참는다. 참다 보면 익숙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끝내 소화시키지는 못한다. 술 한 잔 거나하게 하면 터지기도 하니까.
시인은 손모가지 잠깐 내주다, 뒤집혔다.
시인의 편에 서겠다는 사람들은 아마도 긴 소송전에서는 숨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시인은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치열하게 싸움을 준비했을 것이다. 구겨진 실크 정장 상의 같은 인생을 살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게 하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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