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집, 돼지들에게. 이미출판사
시란 게, 언어를 갈고닦아 영롱한 빛을 내게 하고, 의미를 욱이고 채워 탁하면 억하고 알아먹어야 함에도 능력이 되지 않아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이해가 될 듯한 시를 만나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따라 하고 싶어지고 말을 붙여 보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반가움을 표시하고, 응원을 하고 싶어서 주접일지도 모를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영혼이
우리가 미워했던 육체를 이기리라(쪽 표시 없는 9쪽)
우리가 사랑했던 육체는
우리가 미워했던 영혼을 고치지 못한다.
누가 누구를 정리했다고? 지금 뒤에서 수근대는, 앞에서 염탐하는 당신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끝나지 않았어. 이건 리허설이야.(착한 여자의 역습, 마지막 연. 13쪽)
모든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속성이 있다. 그런데.... 그게 착각이야. 인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물질로 이뤄진 네가 없어질 때까지.... 아니 네가 없어진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다. 너 모르지? 모르니 그딴 얘기하는 거야. 모든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어쩌고 저쩌고 말이야.
나는 피 흘리며 싸웠다.
띠로 싸우고 때로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인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돼지들에게 중. 18쪽)
진주를 달라는 돼지들은 말한다.
이건 네가 준 적이 있어서야. 왜 난 안 돼?
돼지를 죽이지도 않고, 진주를 주지도 않고,
타협 않고, 지치지도 않고
그렇게 살려면
어떡해야 하지?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야의 모범이라고 믿고 있다
신분이 높고 고상한 돼지일수록 이런 착각을 잘한다
(돼지의 본질 첫 연. 19쪽)
그래
그렇지
돼지는 돼지일 뿐이라는
그 단순함만 알면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을지도 몰라
늘고 병든 몸에
새록새록 돋아나는
그 힘 말이야.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돼지의 변신, 첫 연, 20쪽)
여우는 원래 돼지였대.
그래?
그래!
나도 언젠가부터 그렇게 느꼈어
슬퍼하지 마.
네가 있었다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네 고민이 줄어들었을까?
위로가 되었을까?
그래서 미안해.
겸손한 문체로 익명의 다수를 향해 다정한 편지를
띄우지만
당신처럼 오만한 인간을 나는 알지 못하지
당신보다 차가운 심장을 나는 보지 못했어
계산된 ‘따뜻’에 농락당했던 바보가 탄식한다
늦었지만
순진을 벗게 해 줘서 고마워
선생님. (하늘에서 내려온 여우 중, 마지막 두 연, 23쪽)
공군 초임 파일럿은
최초의 다섯 번 전투 임무를 마치기 전에
반 이상이 죽었대.
육군 초임 소위도
참전 후 거의 최초 전투에서 많이 죽는대.
넌
파일럿도 소위도 아닌데
훈련받지도 않았는데
살아냈어.
난 그게 너무
고마워.
지금은 아니야.
나는 내가 완전히 잊혀진 뒤에 죽겠어.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 않으니까. (최소한의 자존심, 31쪽)
그래, 그러면 좋겠어.
이렇게 살아 있는 네 앞에서
웃으면 좋겠어.
네가 누운 무덤에서 나 혼자
눈물 흘리며 뒤늦은 위로하긴
정말
싫어.
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좀도둑도 살인자를 고발할 수 있고
살인자도 살인자를 고발할 수 있어 (자격, 마지막 두 연, 32쪽)
자격 없는 자들은 그 입 다물라!
그랬으면 벌써
정말 벌써
세상은 조용했을 거야.
그렇게 조용한 세상은
무덤 속일 거야.
제사장들만 신나서 춤추는 공동묘지.
난 아직
죽지 않았어
그것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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