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따라 걷는 생각 7(오늘은 두 편의 시 아니 세 편)
원고 청탁 최영미 시인
시 2편 달라는 메일을 받고
세수도 하지 않고
세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고
계량기 교체하느라 단수한다는 안내방송도 듣지 못하고
시간의 마우스를 이리저리 옮겨
이미 여러 번 우려먹은 기억을 재활용하느라
새벽부터 엉덩이 붙이고 앉아
브런치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는데, 10분 전인데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어떤 사랑의 묘약이 이보다 독하랴
데이트 약속만 떠올려도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그녀를 만난다는 것이 꿈만 같다. 독사진이 없어 무리 속에 찍힌 사진을 보며 흐릿한 얼굴을 보정한다. 너무 예쁘다. 예쁜 이 여자와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에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운동하지 않아도 심장이 고동친다. 사랑은 묘약이었다. 그것도 독한 묘약이었다. 시인은 시 2편 달라는 메일에 들떠 사랑의 묘약이 이럴 것이다고 설명한다. 난 시가 사랑의 묘약이란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의 입장에서는 시는 시인 개인의 감흥이라고 단정했다. 그만큼 공감을 한 시가 없었다. 시를 적게 읽고 건방지게도 가진 선입관인지, 감흥 없는 시가 시를 읽지 않게 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에서는 시인의 마음이 내 마음을 흔들어 첫 데이트 기억에 아직도 가슴이 쿵쿵 뛰더라.
등단 소감 최영미 시인
내가 정말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멀쩡한 종이를 더럽혀야 하는
내가 정말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신문 월평 스크랩하며
비평가 한마디에 죽고 사는
내가 정말 썩을 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안 해도 뭔가 하는 중인
건달 면허증을 땄단 말인가
내가 정말 여, 여류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밥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
고, 고급 거시기라도 되었단 말인가
시 2편 달라는 메일에, 매일 밥 먹는 것보다 먼저 하던 세수도 않고, 머릿속, 가슴속, 마음속 기억을 우리고 있는데, 곧 물이 끊어져 시 쓰고 나면 밥 먹는 것보다 먼저 하던 세수를 못 하는데, 그래도 새벽부터 엉덩이 붙이고 앉아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는데, 이 일을 하려고 시인이 되었던가? 건달 면허증을 딴 것인가? 밥도 되고 꽃도 되는 고급 거시기라도 되는 그런 시인이 되었던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설마 자랑일까? 그래도 마시는 묘약이 시라면 시인은 시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시를 쓰는 시인은 낙원에 사는 모양이다. 매일 독한 사랑의 묘약을 마시니까. ‘싫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낙원’(시, 낙원 중에서) 부디 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을 잘 다루시길…
이렇게 시가 이어지니 이 시인 소설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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