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끝은 끝으로 이어진. 박승민 시집. 창비시선448. 2

무주이장 2024. 2. 5. 14:31

쓰러진 붉은 돌멩이 한알

 

  6년 전의 기억입니다. 냉장창고 가득히 수확한 사과를 보관하여 내년 재미라도 보려고 했던 농부는 너도나도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사과금이 내리는 불상사를 겪었습니다. 무주 만의 사정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봉화 만 평이나 되는 사과밭을 일구던 농부는 땅을 팔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젠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푸념이 일상이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도 무주와 봉화의 농부는 계속 사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땅을 판 사과밭 주인 허 씨 노인의 근황이 알려졌습니다. 시인을 통해서 알려온 소식은 이러합니다.

 

쓰러진 붉은 돌멩이 한 알

 

 밭 앞으로 도로가 뚫리자 땅값이 평당 삼십만원으로 뛰었다. 삽시간에 이십오년생 사과나무 수백그루가 베어지고 꿈틀거리며 기어가던 뿌리 위로 사과나무 평토장이 쓰였다. (중략)

 

 서울서 장사하는 아들 내외 등쌀에 과수원을 팔아치우고 시내 아파트로 나갔던 허씨 노인, 요즘 들어 자주 언덕을 오른다. 번지수를 바꿔놓고 삼단 조경석을 괴고 잔디밭을 깔아놓아도 뿌리는 용케도 주인 살냄새를 알아본다. 베란다나 거실, 안방 장롱 속에 숨어 있던 가지들이 재작년보다 더 두꺼운 잎과 씨알 좋은 붉은 향을 줄줄 흘리면서 걸어나오고 집들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십일월 열사흗날, 친구 강달수네 사과밭 앞에서 쓰러진 노인의 오른손엔 사과 한알이 쥐여 있었다. 지방 일간지의 일단짜리 기사에 의하면 저녁 아홉시경, 새로 조성된 전원 주택단지 산 33번지 가로등 밑에서 허아무개(91세) 노인이 붉은 돌멩이를 손에 들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작년 초 냉해를 입어 사과꽃들이 순식간에 쓰러졌습니다. 그 덕에 사과금이 뛰었습니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 주던 정부는 수입과일에 매긴 관세를 내린다며 호들갑을 떱니다. 정부가 호들갑을 떨면 배추값이 떨어지고 마늘값이 추풍낙엽이 되고 말지요. 오른 값에 빚이라도 갚을 요량이던 농부들은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도시인이 힘들다면 농부는 참아야 합니다. 다행히 사과는 수입을 하려고 해도 재배하는 나라가 극히 드문 모양이었던지, 아니면 우리 사과처럼 맛이 좋은 것도 아니든지 수입과일을 잔뜩 들일 모양입니다.

 

 그래도 하던 일이었는데, 허 씨 노인은 손을 털고 나서는 맥이 영 없었습니다. 허 씨 노인은 요즘 같은 사과금은 구경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쟁여두었던 사과를 출하하는 농부의 표정이 부드럽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입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