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젊을 때 여자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와 오랜 세월을 만났지만 데이터는 일 년에 세 번만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만나면 서로 좋았다가, 두 번째 만나면 뭔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고, 세 번째 만나면 이별을 통보받았습니다. 같은 패턴으로 서른 번쯤 만나면 여자를 이해하고 싶어 지고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싶어 집니다. 제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골랐던 이유입니다. 명백한 실수입니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김 소장의 이 책을 통해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김 소장은 사랑을 ‘어떤 대상을 귀중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으로 정의합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이 아닌, 사랑 일반에 대한 정의입니다. 이에 비해 프롬은 사랑을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으로 정의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 국한시켜 동기(갈망)적 측면에서 규정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만 놓고 보면 두 정의는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즉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이란 결국 사람의 성장과 행복에 의해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아끼려면 왜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흔히 사랑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모조리 들어주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주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김 소장은 영화 ‘반창꼬’에서의 미수와 강일의 사랑과 소설 카르멘의 돈 호세와 카르멘의 사랑을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연인의 요구나 행동이 인간 본성에 반할 경우 연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연인의 행위를 저지하는 것이 왜 사랑인지 쉽게 설명합니다.
자식이 큰 잘못을 하면 부모가 회초리를 드는 것, 친구가 잘못을 범하면 비판을 하는 것은 그들이 상대방을 사람으로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프롬이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을 강조했던 것은 바로 이와 관련됩니다. 사람의 성장과 행복이란 곧 인간 본성의 실현과 발양입니다. 또한 프롬은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생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라고 말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사랑하는 이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줄 알지만, 한 사람만 사랑하는 이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제가 한 과거의 사랑은 사실 사랑이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사랑을 하고 있느냐 자문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정말 어렵습니다. 프롬은 사랑도 하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사랑도 능력이라는 것은, 아무나 사랑을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하려면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는 동기가 있어야 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현대인은 사랑에 대한 동기는 강력하지만(물론 그것이 상대방을 사람으로서 사랑하려는 동기가 아닌 경우는 흔합니다)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좀처럼 계발하지 않는다고 김 소장은 진단합니다. 프롬이 말한 사랑을 젊은 시절 읽었을 때, 제대로 이해했다면 3번 보고 헤어지는 일의 반복은 없었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당시 멘토가 없는 상황에서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좋은 선생을 만나 이제라도 제대로 알았으니 고마운 일입니다. 열심히 능력을 키워보도록 할 생각입니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 본성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능력을 가질 수 없는데, 프롬이 특히 강조하는 인간 본성의 요구는 자유와 독립성입니다.
‘싸우는 심리학’에서 김 소장은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 터를 잡고 사는 사회를 ‘건전한 사회’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정신 개조인가? 아니면 사회 개조인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러면서 다가올 세상은 인간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가 기존의 주류 심리학에서 한계를 느끼고 다시 공부한 심리학에 터 잡고, 주장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논리에 빠져듭니다. 다만 과연 이런 주장이 주류가 되는 세상이 올 지, 그때가 언제쯤 일 지에 대한 기대와 함께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세상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며 소외를 느끼고, 생각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가진 마음병의 원인을 규명하고 마음병을 치유하는 방법을 알아보며 다들 그러니 나도 그런 채 살아야 한다는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 책을 통해서 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넓어지고 깊어진 듯 기분이 나아집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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