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관이 다르면 싸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기심에 가득 찬 사람을 친구로 여기기 싫었습니다. 한두 개 사실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은 막혀서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나면 5분도 되지 않아 서로를 가르치다 말싸움으로 끝났습니다. 앞 사람의 말을 이어 내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는 단어는 고작 몇 개 가난했습니다. 세상 확 바뀌려면 나이 든 사람들이 생물적 소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결론이 너무 허술해 미덥지 못했습니다. 나이든 사람이야 오늘도 생기고, 젊은이라고 해서 꽉 막힌 친구가 없다고 자신하지 못하면서 속이 비틀어져 한 생각이었습니다.
세월의 버스를 타고 뒤로 물러나는 풍경을 보다 갑자기 제가 보였습니다. 이기심이 얼굴의 주름 곳곳에 숨어 있는 제 모습이 차창에 보였습니다. 대화를 하지 못하는 꽉 막힌 노인이 그곳에서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말을 듣기보다는 하고 싶어 안달하는 조급한 얼굴입니다. 혼자 부끄러워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고 열을 식혔습니다. 시인은 어찌 살았을까요?
쓸데없는 하루
서울에서 선배가 와 술을 마셨다
그는 오줌 누러 세번 일어났고 나는 한번 일어났다
우리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전립선비대증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서울에서 선배가 와 맥주 세병과 소주 세병을 마셨다
내가 핵전쟁이 나도 동해 바닷가는 안전하다고 하자
그는 죽어도 서울에서 죽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는 고궁을 해설하며 술값을 번다고 했고
나는 시를 찍어, 사주는 사람이 있으면
부르는 값에 넘긴다고 하였다
서울에서 선배가 와 술을 마셨다
그는 주로 소주를 마셨고
나는 맥주를 섞어 마셨다
내가 지난겨울 광화문에 나가
촛불을 들고 서대문까지 행진했다고 하자
그는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에는 입도 쩍 못하던 것들이
요즘은 겁도 없이 나선다고 했다
서울에서 온 선배와 속초 전통시장 지하 횟집에서 술을
마셨다
그는 통 안주를 안 먹었고 나는 술보다 안주를 더 먹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덧 저녁이 되어
주인이 자꾸 눈치를 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일어났다
선배를 만나 쓸데없이 하루를 보내는 시인의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저도 저렇게 살려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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