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시간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거래하던 은행에서 억지로 카드를 만들라고 해서 하나 만들었더니, 이 카드 저 카드 두 장만돼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교통카드로 사용하는 카드를 제외하고는 쓸 일이 없는데 아내와 어디를 가다 할인이 된다고 해서 새로 장만한 카드를 그만 쓰고 말았습니다. 새로 만든 카드대금에 대비한 결재계좌에 잔고가 있어 염려를 않고 있었는데, 바쁜 시간에 전화가 왔습니다. 또 무슨 광고 전화인가 받고는 곧장 끊으려 하는데 말이 심상치 않습니다. 신용불량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화를 끊지 못하고 묻는 말에 대답을 했습니다. 상당히 고압적이고 잘못을 지적하는 품이 제 기분을 풀고 있는 듯해서 전화 너머 사람과 달리 저는 우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듣다가 제가 물었습니다. “얼마가 연체되었나요?” 유창한 말이 잠깐 끊어졌다가 답이 왔습니다.
“천 원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제가 카드 대금을 납입하지 않아 연체를 했습니다. 연체를 통보해 주는 전화안내원은 저를 나무랐습니다. 자기 말 대로 하지 않으면 신용불량자로 자본주의 사회의 빛나는 금융기관을 이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박했습니다. 그래도 고마웠습니다. 나의 금융생활에 오점이 찍히지 않고, 잘못했으면 신용불량자의 낙인이 찍혀 어느 지하도에서 노숙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가 불행을 막아주었습니다. 그날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래도 한동안 우울했습니다.
시인도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개합니다.
한동안 우울했네
부끄러운 얘기네
건널목을 건너다 실수를 했는데
젊은 운전자가 쌍욕을 하며 지나갔네
그래도 고마웠네
나의 어딘가를 망가뜨리거나
생을 뚫고 들어오지 않았으니……
그렇게 불행은 오다가 갔네
이왕이면 멀리 가거라
그리고 길바닥에 남은 일은
어쩌다 보행신호를 어긴
낫살이나 먹은 남자가 쓰라리게,
그만한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세상은 건널목과 신호등 천지인데
금수처럼 돌아다니지는 않았는지
두 손을 들고 오래 서 있는 일
그날 아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한동안 우울했네
시를 읽다가 짐작하셨겠지만, 제 경험을 시인의 시를 표절해서 표현했습니다. 국민카드 안내원이었는데, 저보단 젊었겠지요. 무어라 이름을 말하긴 했지만 기억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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