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문하여 시인 중 나이 드신 분들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이 워낙 빠르게 변하고 문단이라고 빨리 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자주 소개되는 분들도 역시 젊은 시인들이 대다수라서 그리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동갑내기 시인은 늙어 추한 모습을 보인 대가라고 여겼던 시인과 싸우느라 시가 숫돌에 갈려 날이 시퍼렇게 서서는 불의를 보면 깍둑썰기를 했습니다. 늙은 시인은 무기가 필요해 시를 쓰는 줄 알았습니다. 지지 말라고 응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 들면 작품 활동이 뜸해지리라고 짐작한 것도 잘못임을 알았습니다. 이상국 시인의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을 서가에서 뽑은 행운이 올 줄 몰랐습니다. 우선 십 수년의 세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시어가 편안합니다. 시어를 읽자마자 그림이 쉽게 그려집니다. 이런 시 과거 교과서에서 배웠던 청록파 시인의 시를 읽고는 처음 읽는 듯합니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술이 익어 한 잔 마시면 얼굴이 불콰해지듯 저녁놀이 발갛게 타는 그림을 그린 적이 언제였던지요.
시인의 시를 소개합니다.
끝과 시작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선덕여왕 시절부터 중천을 떠돌던 내가
어느날 발 크고 소리 잘하던 정선 사람
내 어머니 자궁에 전광석화처럼 뛰어들어
늙은 시인이 될 줄은 몰랐어
그래도 그게 어디냐
벌레도 아니고 마소도 아니고
그것도 노래하는 사람이라니,
공일날 꼴은 안 베고 예수 따라다니더니
쓰레기 같은 구호물자를 타 왔다고
예배당에 못 다니게 하던 아버지야
같이 살고 싶었으나 살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새처럼 돌멩이처럼 정처가 없었어
얼마나 먼 데서 온 사람인데 어제는
카드는 안 받는다는 세차장 주인에게
속으로 막말이나 해대는 이런 나를 누가 알겠어
오, 생 하나가 고작 이런 것뿐이라니’
그렇다고 그런 나를 어떻게 피해 가겠어
미시령 동쪽 바닷가에 이층 방 한칸 세 놓고
늙어가는 아내와 티브이 드라마를 볼 줄은 몰랐어
나도 내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어
그래도 실없는 나의 노래가
끝까지 내편이 되어줄 줄 어떻게 알았겠어
어머니가 그리워지고, 어머니가 뭘 잘하셨는지 돌아가신 뒤라도 이렇게 기억이 생생합니다. 억척같이 살았던 어머니는 아들이 무언 지는 모르지만 잘 될 것을 확신했지요. 하지만 이제 늙은 생활인이 되어 늙은 시인의 시에 홀려 몸은 녹고 옛 기억에 빠집니다. 세 명이 가서 이인 분을 시켰더니 보일 듯 아닌 듯 눈을 흘기는 식당 아지매에게 따질 수는 없고 속으로 ‘어때서’ 항변만 하는 소시민이 되었습니다. 말을 갈고닦아 시를 배열하던 시인이지만 생이 고작 이런 것일 뿐이라면서도 실없는 노래가 있어 행복한 듯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예배당, 새처럼 돌멩이처럼, 방 한칸 세 놓고, 늙어가는 아내, 티브이 드라마, 내 편. 이런 말들에 재주가 있었으면 그림 한 장 그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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