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시초(1)
시는 도처에 있다는 말을 합니다. 시인이라서 그런가 보다 관념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상국 시인의 시 한 편을 읽다가 그만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의 일상이라서 시라고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름다움을 상실한 세상이 슬픔임을 알아서 한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상의 소소한 생활, 무언가 부조리한 듯한 세상사가 시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저도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한 시를 소개합니다.
제목은 무제시초(無題詩抄)입니다. 짙은 글자체가 시입니다. 그렇지 않은 글자체는 제 감상이고요. 시를 감상하시는데 방해가 될지 모르지만 제 감흥이 절로 따라가니 글모양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길 가다가 시 한행을 주웠다.
그걸 잃어버릴까봐 천천히 걸었다.
중학교 때 겪었던 일입니다. 내일모레가 시험이라 모두가 시험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시절, 친구들과 같이 걷다가 뒤통수를 때리는 장난이 잦았습니다. 기분 나쁜 장난이었고 간혹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친한 티를 폭력으로 표현했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사회자는 청중을 웃기는 방법으로 출연자를 비하하곤 했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가수 임희숙 씨를 ‘고릴라’라고 소개하여 분란이 있었다는 기사가 연예 주간지에 나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시험공부를 하고 학교를 걸어 나가던 중에 무슨 얘기 끝에 웃으며 제 친구의 뒤통수를 때렸더니, 발끈하면서 한 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머리 때리지 마라. 외운 게 헝클어진다.”
길 가다가 시 한 행을 주운 시인이 천천히 걸었다는 말에 저도 제목이 없는 시초를 기억했습니다.
“친구의 뒤통수를 때렸다. 때리지 마라. 외운 것 날아간다. 친구의 말을 잃어버릴까 봐 천천히 걸었다.”
김수영은 서른다섯에 닭을 길렀다고 한다.
나는 젊어 한때 관(棺)을 팔았다.
젊은 시절, 소소한 기억을 문장으로 만들자 생각하고 자판을 앞에 두면 생각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뺑소니를 칩니다. 그런데 서른다섯에 “넌 뭐 했니?”라고 물으면 도망치던 생각이 뒤돌아보고는 걸음을 멈춥니다. 그런 정도야 쉽게 답을 하지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저 질문을 꺼내는 것이 뭐 그리 어려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상이 시라는 말이 더욱 닿습니다.
정선 사는 유아무개 시인이 그러는데
마을 사람들이 기르던 개에게 미안해서
이웃집 개와 바꿔 잡아먹는다고 한다.
저도 저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똑같은 말을 듣고는 저는 먼저 실없는 웃음이 기어 나왔습니다. 주인이라면 줄에 매달려서 몽둥이찜질을 당하더라도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개라고 하지만, 미안해서 이웃집 개와 바꿔 잡아 먹히는 개의 입장이 당황스럽고 사람의 행동이 황당했습니다. 개의 상실감이 저에게는 배신이라는 단어로 다가왔습니다. 뭐라고 잘못을 지적하고는 싶었지만,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동네일이라 입을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시가 이렇게 여기저기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자기 집 개를 찾았다.
엊그제 집 앞을 지나기에 잡아서 먹었다.
다른 친구의 말에 이 친구 하는 말
새끼 뱄는데.
그래 새끼가 있더라.
그렇게 아무 일없이 헤어졌다.
수년 전 몸을 열고 병마를 몰아낸 선배의 어딘가에
그것이 몰래 숨어 있다가 기어코 그를 데려갔다.
몸은 짐승이다.
병사(病死)는 사고(四苦) 중 두 개에 해당합니다. 생로했다 병사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생한 후 늙을 시간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일은 안타깝습니다. “몸은 짐승이다”는 시어는 저는 끝내 꺼낼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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