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이상국 시집. 창비시선 456 (3)

무주이장 2023. 11. 21. 17:07

  부산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온 첫 해 겨울, 눈이 펑펑 오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도시라서 눈 내리는 걸 본 강아지가 뛰어다니는 건 보지 못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강아지처럼 좋아라 했습니다. 당시 맥없던 저는 괜히 가장으로서 책무를 다 한 듯한 착각을 잠시 했습니다. 눈 내리는 게 제 능력과 하등 관계가 없는 것임에도 그런 생각을 해서 스스로 무안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인의 고향이 아마도 진포인가 봅니다. 그곳에 내리는 눈을 보며 시인이 쓴 시가 좋습니다. 왜 좋은 지 그런 건 묻지 마십시오. 그저 좋습니다. 소개합니다.

 

겨울 아야진 (박용래 운으로)

 

진포(津浦) 가에 내리는 눈은 버려진 그물 위에 내리고

횟집 간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기도 한다.

 

진포 가에 내리는 눈은 어판장 핏물 위에 쌓이고

북어 대가리에도 쌓이고

보망하는 어부들 어깨에도 쌓인다. (보망은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쓸데없는 짓을… 미안합니다)

 

진포 가에 내리는 눈은 폐선에 모여

죽은 불가사리들의 꿈을 덮어준다.

 

진포 가에 내리는 눈은

종일 파도다방 창가에서 누굴 기다리기도 하고

민박집 굴뚝에 올라가 몸을 녹이기도 한다.

 

  산골살이를 할 때면 가장 어려운 계절이 겨울입니다. 저녁 8시면 모두가 잠드는 마을에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은 인기척을 느낄 수 없습니다. 바람이 매서우면 매서울수록, 눈이 내리면 눈 때문에 사람들은 피붙이 곁으로 모여들어 잠을 청합니다. 도시에서 이주해 홀로 창밖을 보는 겨울, 바람 속, 눈 속에서 눈 부릅뜬 가로등 불빛을 보고 있으면 그저 외로움이 쳐들어옵니다. 꼼짝하지 못하고 잡힙니다. 그런데 진포 가에 내리는 눈은 약간은 다릅니다.

 

  횟집 간판에 한가로이 앉기도 하고,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살포시 덮기도 합니다. 명태의 핏물 위에 쌓이고, 하늘로 헤엄치려 눈 부릅뜬 북어 대가리에도 쌓이고, 명태잡이 어부들의 어깨에도 쌓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시뻘건 복수를 잊게합니다. 말라서 부서진 꿈도 살포시 덮어줍니다. 눈은 원한도 덮고, 좌절된 꿈도 위로합니다. 그렇게 눈은 횟집 간판에 앉아 바다로 떠난 누군가를 그리워하다가 스스로 슬픔에 겨워 지쳐 따뜻한 민박집 굴뚝에 올라가 스스로 몸을 녹입니다. 눈이 녹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산골살이든 어촌살이든 한겨울이면 외로워지는 것은 눈 때문일까요?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혹시 젊은 그대들은 외로움 이딴 건 모르는지요? 궁금해지는 겨울의 초입입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