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의 수준과 사회의 수준
학창 시절 누구나 경험한 일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질문할 사람 손들고 하라고 하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은 경험입니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경험입니다. 기억나시죠? 그 기억을 떠올리신 김에 왜 그랬는지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첫째, 질문이 초점이 없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제 실력이 들통나는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으로 모두의 시선을 잡고 싶은데 능력이 안 되는 것을 자각한 이유입니다. 둘째, 질문이 허술하다고 하더라도 선생이 질문을 바로 잡고 성실히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허술함을 지적하고 쫑꼬를 주며 심지어는 교실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주체의 자질’ 문제이고, 둘째는 ‘교실의 문화’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둘째에는 ‘선생의 자질’ 문제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선생의 기억입니다. 한국 기자들이 질문을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어떤 기자가 쓴 글을 읽고 수긍하기 어려웠답니다. 그가 언론계 내부의 ‘문화’에 책임을 돌렸을 뿐 ‘주체’로서의 기자가 어떤 사회적 관계를 의식하며 질문 대상과 질문 내용을 취사. 선택하는지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며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한국 기자들은 초등학생도 궁금하지 않을 질문을 퍼붓거나,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던지는 일은 잘한다며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들에게는 ‘함부로’ 질문을 던지며 질문의 수준과 내용도 아주 천박하다고 선생은 기억합니다. 반면 광고주-기업인이나 검찰 등의 권력기관을 상대할 때는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 일을 주로 합니다. 질문을 하더라도 ‘미리 짜고’ 합니다. 그들은 독자들에게 사안의 본질을 바로 이해시킬 수 있는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들도 사안의 본질에 관한 의문을 품지 않는다며 그들은 스스로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질문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수준이 낮거나 불필요하거나 오해를 유발하는 질문을 함으로써 오히려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합니다. 그러면서도 국민 대다수가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을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정보에만 묶어두는 게 바로 자기들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국민의 평균 수준이 낮아진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기억합니다.
선생은 기자들에게 왜 그런 바보 짓을 하는지 이미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자들은 선생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제대로 질문을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식하고 나태해도 ‘엘리트’ 행세할 수 있는 상황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선생은 짐작합니다.
그런데 선생의 짐작이 왠지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제가 질문을 하지 못하고도 엘리트라는 생각은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괴감과 함께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을 느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선생님의 다음 수업시간은 다시 돌아올 것이고 또 주어질 질문시간을 두려워 했습니다.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 친구들은 그런 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함부로 제가 아는 척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이 바뀌어 기자들을 판별하는 기계가 좋아져 금방 기자와 기레기를 구분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기레기가 ‘엘리트’ 행세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벌거벗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도 옷을 입은 척하는 미치광이 얼빠진 사람일 것입니다. 미친 기레기들이 쉽게 식별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P.S.: 선생님 기자가 엘리트 행세할 수 있었던 세월은 벌써 지난 것 같습니다. 질문 시간에 앉아 그들이 느꼈을 감정은 기시감이었을 것입니다. 쪽 팔기 싫고, 맞기 싫은 마음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모처럼 선생의 기억에 딴지를 거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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