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불화사회에 저항하는 의지를 포기하는 이유
오늘날 풍요-불화사회에서의 불평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소득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고 그런 추세가 지속되고 있으므로 이 불평등을 끝장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야 마땅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풍요-불화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항을 포기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부자들이 승리해 왔고 또 지금도 승리하고 있으며, 그들이 권력, 언론,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에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능력주의를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능력 탓, 즉 개인 탓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능력주의에 따르는 부의 분배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의롭거나 공정하지도 않습니다. 사회적 기여도나 생산성에 따라 보상을 한다는 주장이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것은 이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정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개인의 사회적 기여도가 순수하게 그 사람 혼자만의 기여도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벤처자본가이자 젠자임 회사의 전 CEO인 짐 셰르블롬의 말을 인용하면서 개인의 업적은 이전 시대 인류의 업적이고, 사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설사 누군가의 업적이 제 아무리 크다 한들 그가 부를 모두 가져가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쉽게 거부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돈의 포로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기여도, 생산성, 노력 등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는 것을 정의롭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의를 요구하는 건강한 마음과 돈에 대한 극단화된 욕망이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안이 사라지고 그에 따라 돈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적 기여도에 따라 차등으로 보상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상이 꼭 돈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 설명 부분에 저는 설득이 되었습니다.
존중 불안, 위계 불안 등으로 인한 우월감 추구는 사람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불평등을 용인하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의 소득이 오르는 것을 싫어합니다. 한국에서 정규직 노동자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문제나 그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반대하기도 합니다. 그 심리는 무엇일까요?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노력과 투자를 많이 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만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돈 이외에는 다른 보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정의감이 능력주의와 얽히면 이렇게 낮은 위계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견해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그 보상이 꼭 돈 혹은 큰돈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정의롭지 못합니다. 저자의 대안으로써 돈이 아닌 다른 보상에 자꾸 눈길이 갑니다.
한국인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불평등을 용인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는 억울함입니다. 한국인들은 우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어서 억울합니다. 적성이나 재능으로 직업을 선택하지 못하고 돈이 되는 직업을 선택해야만 했던 사람은 억울하다고 합니다. 원치 않는 삶을 사는 과정에서 쌓인 억울함은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만 하고, 물론 그 보상은 반드시 돈이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낮은 위계의 사람들이 자신보다 덜 억울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낮은 위계의 사람들이 소득이 적다고 항의하면 “너희는 나처럼 노력하지 않았잖아!”라고 말하며 벌컥 화를 내는 것입니다.
풍요-불화사회에서는 위계 간 불화, 위계 내 불화로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졌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연대의식이나 계급의식, 공동체 의식 등이 발을 붙이기 힘듭니다. 오늘날 한국인, 특히 젊은 세대가 원하는 정의와 공정은 부정의한 세상을 뒤바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시험 성적을 기준으로 공정하게 공무원을 뽑는 것처럼, 자신의 절실한 노력만이라도 제발 공정하게 평가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풍요-불화사회에서의 정의, 특히 청년들이 추구하는 정의는 체제순응적인 정의이고, 개인주의적인 정의입니다. 즉 그것은 불평등과 차별을 전제로 하고 필요로 하는 왜곡된 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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