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녔던 대학은 버스를 내리면 정문까지 백 미터 남짓 거리가 됩니다. 정문까지 거리의 양 옆에는 서점이 4~5개 있었습니다. 돈이 생기면 책을 사려고 들르곤 했습니다. 교양 수업을 하던 국어국문과 교수님이 교재를 판매하는 서점을 소개하면서 대학가에 서점이 자꾸 줄어든다며 대학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걱정을 하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서점 옆에는 찻집과 당구장 그리고 술집이 에워싸고 있었지요. 복사집도 기억이 납니다. 서점이 힘에 부쳐하던 시절이었지만 책을 친구처럼 곁에 두고 읽던 곳이 대학이었습니다. 교과서가 되었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든, 서점에서 고래 힘줄 같은 제 돈으로 샀던 책이든 늘 책을 곁에 두는 곳이 대학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문을 기준으로 해서 대학 구내와 밖의 공기가 달랐던 기억이 납니다. 책이 없는 곳의 공기는 왠지 탁하고 불편한 것에 반해 정문을 통과하면 대학 안 공기는 맑고 신선했고 시원했습니다. 책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섬에 있는 서점’ 제목이 무척이나 한적하니 우울감이 느껴집니다. 처음 책을 열었을 때, 무언가 분위기가 어두워 읽기를 중단했습니다. 최근 읽었던 글들이 모두 우울한 내용이어서 새롭게 우울한 책을 또 읽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열었던 책이라 며칠 뒤 조심스레 다시 열고, 읽었던 부분을 확인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제주도나 남해나 거제도도 섬이지만 이 소설 속의 섬은 그렇게 큰 섬이 아닙니다. 서점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부치는 곳이라 그리 생각한 것입니다. 이 서점을 연 것은 결혼을 앞둔 대학 동창입니다. “서점 없는 동네는 동네라고도 할 수 없지” 둘은 의기투합했고 여자의 고향 동네에 가진 돈을 모두 투자하여 서점을 만듭니다. 하지만 서점을 열게 된 결정적 공헌자였던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남편은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여 술에 찌든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서점 주인의 죽은 아내, 언니인 처형은 바람둥이 남편과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동네 파출소장은 독신으로 살고 있습니다. 유머를 잃지 않고 살지만 등장하는 동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 추운 겨울 바닷바람에 몸을 움츠린 듯 기운들이 없습니다. 서점 주인과 결혼하게 되는 출판사 직원도 그냥 일상적인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만 활기가 넘쳐 보이지 않습니다. 달랑 편지 한 장 남겨두고 아이를 서점에 버린 아이 엄마는 다음 날 바다에서 시신으로 떠밀려 옵니다. 남겨진 아이를 입양한 후부터 이야기는 색을 달리합니다. 섬에 서점이 생기고 난 뒤 생긴 변화는 버려진 아이가 서점 주인에게 입양되면서 본격적인 변화를 시작합니다. 아이가 만드는 변화는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움을 줍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처형은 바람둥이 남편과 헤어지고, 독신인 파출소장은 아내를 얻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주변 사람들의 생활에 활기를 주고 행운과 함께 행복을 전파합니다. 여름 한철 관광지로 북적이는 섬은 중요한 소재가 되지 않습니다. 흥겹고 흩어진 관광지의 분위기는 동네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습니다. 서점이 그런 장소인 것 같이 섬은 서점의 영향을 받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의 순한 영향에 휩싸입니다.
서점 주인이 불행히도 죽지만 서점은 다른 주인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비가 오면 옷이 젖듯이 사람들의 마음에 서점이 계속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합니다. 서점에서 자란 아이에게도 서점 주인과 결혼한 출판사 직원이었던 아내도 서점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다는 것에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위한 결정에 서점은 관여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섬에 있는 서점은 그렇게 주인이 바뀌고 계속 운영됩니다.
살면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많습니다. 각자 호구지책을 유지하면서도 우리는 선한 영향을 주는 존재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제가 우울한 책을 읽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은 선한 영향력의 부존재에 대한 실망일 수 있습니다. 다음 읽을 책들도 선한 영향력을 주기를 희망합니다. 책을 소개하는 곳이 서점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서점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제가 다니던 대학 정문 길 옆 서점은 몇 개가 살아남았을지 궁금합니다. 그때 그 시절 대학 정문 앞의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생활을 지탱했던 남편이 돌아가신 후 서점을 차렸던 부인을 걱정하면서 국어국문과 교수님은 교재를 파는 그곳 서점을 소개하셨습니다. 서점에는 이 소설 같은 이야기가 많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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