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가의 귀신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이 나이에도 정 작가의 책을 읽은 후에는 캄캄한 방에서 자다가 일어나 거실로 나가거나 화장실을 가려면 먼저 불을 켜야 할 정도로 무섬증이 생깁니다. 아내가 집안 여기저기 센스등을 부착한 것은 혹시 정 작가의 이야기를 읽은 때문이 아닌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이야기가 무섭긴 하지만 귀신을 알고 싶어서 읽습니다. 사연 없이 귀신이 왜 생겼겠습니까? 한을 품었던, 못다 한 말이 있던, 누군가가 보고 싶던 귀신은 이유가 있어 나타납니다. 이유가 있어 나타났으니 들어주고 도와주면 물러나는 것이 또 귀신입니다. 그게 진짜 귀신 이야기입니다. 원한에 사무쳐서 아무나 뜬금없이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는 이야기는 그래서 무섭지도 않고 재미도 없습니다. 애나벨 같은 영화는 아무리 해도 원한을 풀지 않으니 재미없습니다.
산 사람의 마음에 붙어 죽으라고 떠나지 않는 미움이나 질투와 달리 귀신은 쿨하게 떠날 줄 압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생긴 마음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귀신의 퇴장은 쿨합니다. 상처가 귀신을 출현시킨 것이라면 귀신의 퇴장은 곧 사람의 상처가 치유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귀신 이야기가 결국은 마음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가 될 수도 있지요. 해소되지 못한 미련과 풀지 못한 원한의 매듭을 푸는 이야기가 귀신이야기이면 좋겠습니다. 인과론적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귀신 이야기는 어떻게 사는 게 좋은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잘못 살면, 비가 오기만 하면 자꾸 산 사람 곁에 찾아와 늘 똑같은 이야기를 우울하게 하는 귀신이 되어 구천을 헤매게 되니까요. ‘저주토끼’에서 할아버지가 비가 오는 날이면 집에 찾아와 했던 이야기를 자꾸 반복하는 이유는 잘못 사셨기 때문이었지요.
‘애나벨’이라는 영화에서는 저주를 퍼붓는 귀신이 붙은 물건들을 부부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한밤의 시간표’에는 귀신이 붙은 물건들을 보관하고 연구하는 연구실이 소개됩니다. 야간 경비원은 모든 직원들이 퇴근을 하면 정해진 시간에 귀신 붙은 물건들이 보관된 방의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혹시 소리가 나거나, 누가 나타나더라도 문을 열어 확인하거나 대꾸를 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동물이 호기심이 얼마나 많고 고집은 또 얼마나 심합니까? 그래서 인간 사회에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볕이 좋은 날, 한 번씩 귀신 붙은 물건들을 말리며 몸피가 불은 물건들의 무게를 줄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밤이면 영락없이 나타나서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통제하고, 동물실험실 양은 고시원에 사는 손가락 잘린 사람과 같이 자며, 버려진 손수건은 남자에게 밤을 새워 쓰레기통을 뒤져 자신을 찾다 지치고 미치게 합니다. 비통한 쾌감에 빠진 남자는 헤어지자는 정부를 죽이고 정부가 자꾸 찾아와 거실에서 방으로 매일 조금씩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그녀가 키우는 고양이를 죽여 그녀의 접근을 막습니다. 하지만 죽은 고양이가 찾아오는 것은 막지를 못합니다.
인과응보가 통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아전인수가 권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호구지책을 핑계로 부당한 명령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용기가 졸렬합니다. 세상을 움직이던 하나님의 섭리는 성경 속에서나 부스럭거릴 뿐입니다. 사람의 감정은 왜곡됩니다. 비틀어진 감정은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가치관은 때와 장소에 따라 변화합니다. 살려면 힘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원한다고 힘이 생기는 세상이 아닙니다. 죽지 못해 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각자도생의 전장에서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는 중입니다. 사람들은 헬조선이라며 지옥도를 말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현실에서 정신 승리를 위해서는 정보라의 연작 소설 ‘한밤의 시간표’ 읽기를 권합니다. 영어로는 ‘MIDNIGHT TIMETABLE’이라고 쓰고 다른 말로는 ‘오밤중 시간표’ 정도 되겠습니다. 그래도 이 책에 나오는 귀신들은 억지를 부리지는 않습니다. 힘도 있습니다. 권선이고 징악입니다. 학수로 고대하셔도 될 이야기책입니다. 꼭 읽어보세요. 재미있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이 책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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