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 혹은 정체? : 왕양명의 지행합일론
“마음속 이기적 욕심을 제거하는 데 오롯이 집중한다는 점에서 왕양명의 입장은 일견 ‘내재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도 어떤 근거에서 왕양명은 자신의 사상이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외부 세계를 포기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왕양명은 마음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취지로 들릴 정도로 외부 세계를 다시 정의하였다. 마음과 세계의 관계를 왕양명처럼 재구성하면, 마음과 세계는 동연(同 延, coextensive)의 것이 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서 마음과 외부 세계를 정확히 구별할 수 없다. 세계는 마음의 작용이 향하는 곳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592~600쪽) (부실한 요약으로 인한 독서의 욕구가 생기시지 않나요?)
“이러한 왕양명의 기본 입장을 염두에 두면서 그 유명한 지행합일론을 검토해 보자. 우리에게 친숙한 도덕적 앎과 행위에 대한 전통적 입장은 두 가지 가능성을 전제한다. 첫째, 우리는 상응하는 행위 없이(혹은 상응하는 행위 이전에) 도덕적 문제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다. 둘째, 앎이 곧 그에 해당하는 행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왕양명은 바로 이 두 가지 분리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 부정이 왕양면의 지행합일론의 핵심을 이룬다. 왕양명에 따르면 첫째, 우리는 오직 동시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앎을 획득할 수 있다. (도덕적) 앎은 관련된 행위를 통해서만 얻어진다고 주장하기 위해 추위, 배고픔, 아픔 같은 경험에 도덕적 앎의 획득을 비유한다. 둘째, 앎이 멀쩡한데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경우는 없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다만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 즉 누군가 비도덕적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실천적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지와 행을 합일하고자 시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와 행은 이미 합일되어 있으므로”(600~603쪽)
“왕양명의 지행합일론에서 말하는 ‘앎’이란 우리가 관습적으로 머리에 떠올리는 ‘지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앎’은 세계로부터 어떤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도덕적으로 처신/행동하는가에 대한 지식이었다. 그렇다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도덕적으로 처신/행동하는가에 대한 지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은 바로 우리를 왕양명의 독특한 철학적 인류학, 그중에서도 그의 유명한 ‘양지론’(良知論)으로 이끈다. 왕양명에 따르면, 인간은 도덕적 행동에 대한 앎을 본디부터 가지고 있다. 그 앎을 바로 양지라고 부른다. 양지론은 왕양명이 도학의 기본 전제 중의 하나인 성선설을 극단까지 추구한 결과이다. 인간은 이미 도덕적으로 완전하다. 이러한 사유 방식에 따르면 현실의 부도덕함은 인간의 도덕성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본래의 모습이 어떤 이질적인 요인(이기적 욕심)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언뜻 이상해 보이는 왕양명의 생각-우리는 오직 동시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앎을 획득할 수 있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앎의 본구성을 감안할 때, 앎의 ‘획득’에서 필요한 것은 그 앎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장기간에 걸친 정보의 누적이나 추론이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은 계기가 필요할 뿐이다. 왕양명에게 ‘행위’는 바로 그러한 방아쇠 역할을 한다.”(604~609쪽)
“이제 ‘행위’에 대해 살펴본다. 왕양명은 도덕적 행위에 대해 무엇이 옳은 행위라고 인식한 뒤 그러한 행위를 하고자 의욕을 가진 다음에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 대한 진정한 인지는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그와 관련된 행위로 전환된다고 생각하였다. 자동적이고 즉각적인 행위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왕양명 이론에서 ‘행위’란 우리가 관습적으로 염두에 두는 유의 ‘행동’과 그 함의가 일치하지 않는다. 왕양명에게 ‘행위’란 주어진 상황에 ‘부딪혀 반응함 responses’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행위’는 상식적으로 ‘행동’이라고 분류되지 않는 ‘생각함’ 같은 것도 포함하게 된다. 다시 말해 만약 어떤 상황에 부딪혀 반응하는 것으로서 누군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행위’이다. 만약 우리가 왕양명이 물(物)을 사(事)로서 간주하고, 사를 뜻이 닿는 곳이라고 한 바를 받아들인다면, 우리 삶 속의 실제 세계는 경험된 세계로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세계는 휴지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텅 빈 어떤 것이 아니라, 활성화되고 깨어 있는 어떤 것이다. 자아와 세계에 대한 왕양명의 이러한 독특한 견해를 바탕으로 하면, 앞에서 제기되었던 왕양명의 지행합일론의 비상식적 요소들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오직 동시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앎’을 얻을 수 있다. 둘째, ‘앎’은 필연적이고 자동적으로 ‘행위’로 이어진다.” (609~614쪽)
“세계 전체와 만나고 있는 도덕적 주체”, "바로 이 점을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왕양명은 송대 이래 많은 도학자의 열망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도학은 사대부 개인의 도덕을 통해 세계의 구원을 꿈꾸는 사유체계이다. 끝으로 왕양명이 성공적인 장군이기도 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장군 왕양명은 중국 남쪽 지역에서 일어난 이민족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바 있다. 일견 도덕적 통치의 자기 충족성을 믿었던 왕양명이 국가의 강제력 행사에 일조했다는 것은 모순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장한 반란 세력의 존재 사실과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군사 정벌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모두 당시 국가가 지방의 갈등을 조정할 능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상황을 반영한다. 왕양명은 정벌 이후 해당 지역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향약에 의존했다. 향약은 인간 본성, 자기 충족적 공동체 생활을 하라는 도덕적 권고 같은 이슈에 대한 왕양명 특유의 견해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처럼 왕양명을 권위주의, 독재체제, 전제국가의 이데올로그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왕양명 사상의 배경을 이룬 것은 통치력을 지방까지 충분히 확장할 능력이 없었던,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 즉 16세기 이후의 명나라였다." (616~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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