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중국정치사상사, 김영민 저, 사회평론아카데미 간행 11.

무주이장 2023. 2. 27. 15:16

형이상학 공화국 : 남송

 

“1127년 남송의 성립은 새로운 왕조 창건보다 더 중대한 정치적.사회적 함의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적어도 후한 시기부터 남쪽으로 계속 확장해왔지만 이 남송 시기야말로 중국이 남쪽으로 확장해온 역사에서 분수령에 해당한다. 이제 북쪽의 중원지역은 중국문화의 전형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남송을 기점으로 해서 다시 한번 엘리트 성분상 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남송 엘리트들은 거주지 및 혼인동맹이라는 점에서 볼 때 지방에서 활동한 점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방 활동으로의 전회의 중요한 배경은 재능 있는 개인의 수와 관직의 수 간의 불균형이었다. 관리 후보군과 관직 사이의 불균형은 남송 이후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엘리트의 다수가 지방에서 활로를 찾는 현상은 왕조가 바뀌어도 꾸준히 이어졌다. 이들은 중앙정부의 권위와는 상당히 독립적으로 활동했으며,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데올로기적 정당성과 정치적 권위를 창출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396~405)

 

중국 지성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당.송의 지적 변천은 그 무엇보다도 일단 불교의 쇠퇴, 그리고 지배적인 정치사상 조류로서 도학의 등장이다. 북송 때만 해도 생경하던 사고체계인 도학은 남송대에 이르자 엘리트들 사이에서 튼튼하게 뿌리내렸다. 이론상 도학은 왕안석이 제시한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정치적 주체성을 제시하였다. 모든 사상은 새로운 이론적 문제들을 배태하기 마련이다. 사회적 책임을 일견 좁아 보이는 자아의 제한된 영역 안으로 밀어넣고 나자 도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적 문제에 봉착하였다. , 개인 도덕에 몰두하는 일이 어떻게 보다 넓은 세계를 포기하는 일이나 자아에 탐닉하는 일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 될 수 있는가? 도학 특유의 통일성 관념이 이 이론적 과제를 담당하였다. 핵심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세계 전체를 전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아의 구조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자신의 진정한 존재(인간 본성)를 실현한다는 것은 곧 세계의 천리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는 세계 전체를 변혁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도덕적 행위자로서 재정의된 것이다. 그리하여 도학자들은 일견 제한되어 보이는 개별 자아의 영역을 넘어서 보다 큰 세계에 대해 주장할 수 있었다.”(408~419)

부디 부실한 요약으로 인하여 책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래서 자세한 설명은 어떤 다른 철인이 있어 설명을 부가하여 주길 기대한다.

 

후기 중국 제국의 엘리트 상당수는 두 층위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정치적 삶을 영위했던 복합적인 정치적 동물로 보인다. 먼저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인 정치질서(이른바 현상 세계)가 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행정 기계의 톱니바퀴 같은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층위로는 형이상학적 세계가 있다. 도학의 이념을 받아들여 자아 수양이 잘된 사람들은 세계의 심층까지 본다. 그들은 사물이 어떻게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해 지탱되는지를 볼 수 있다. 도학은 관직을 보유하고 있든 없든 간에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됨으로써 형이상학적 영역에 접속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형이상학적 영역의 관점에서 볼 때, 도학자들이 몰두한 지방활동의 의미는 반드시 지방적이지 않다. 형이상학 공화국 비전은 당나라 귀족 사회 비전과는 뚜렷이 다르다. 관건은 이러한 복합적 세계관이 과연 실제 정치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전 시대에 비해 진일보한 준시민의식과 실천에도 불구하고, 왜 후기 중국 제국 엘리트들은 쟁의적이고(그리고 대의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않았는가? 왜 엘리트들은 군주와 심각한 긴장을 빚거나 갈등을 유발하는 지점으로 감히 나아가지 않았는가? 왜 중국 제국은 근대 민주 공화국을 발전시킨 유럽 부르주아와 유사한, 정치적으로 충분히 능동적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지 않았는가?”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유혹을 저자는 가진다. (434~440)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중국의 영토는 광대했다. 엘리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는 지방이라는 광대한 미답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을 다른 곳(지방사회)에서 배출할 수 없었다면, 그들은 국가에 대해 급진적인 비판자가 될 최대치의 인센티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갈 곳이 있었다. 바로 지방사회라는 옵션이 있었던 것이다. 급진적인 항의가 초래할 혼란보다는 지방사회에 가서 엘리트 노릇을 하기를 선호한 이러한 형세는 후기 중국 제국 전 시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제국은 광대한 거버넌스 체제 안에서 엘리트에게 건설적인 반대자의 역할을 부여한 셈이었다. 건설적인 반대자가 된다는 것은 급진적인 입장을 취할 가능성을 사전에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정치 시스템 전체를 재구조화하겠다는 시도 같은 것은 배제되고, 대신 협동적인 게임을 수행하게끔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래하는 가장 흥미로운 귀결 중의 하나는, 중앙정부와 급진적인 긴장을 불사할 수 있는 대의제도 개념의 부재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후기 중국 제국의 정치체제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개인성에 따라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폴리스 같은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442~445)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