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햇빛 기다리기, 박선우 지음, 문학동네 간행

무주이장 2023. 2. 8. 13:59

 작가 박선우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의 글에서 갈망과 소망을 보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좌절과 우울, 무력감도 보았습니다. 작가는 사람과의 관계에 치중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가장 어렵다는 사람 만나기입니다. 그의 타고난 성격이 모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섬세함이 지나쳐서 그런 것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박상수(시인,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봅니다.

박선우의 소설이 인물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것은 첫 소설집 우리는 같은 곳에서를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다. 해설을 쓴 신샛별에 따르면, 박선우의 어떤 작품들은 동성애자로서의 자기-정체화와 결부돼있다. 이 과정에서 박선우는 비규범적 주체가 통과해내야 하는 내적 불안과 분열, 대립과 갈등, 화해와 통합의 극적이면서도 지난한 여정을 촘촘히 서사화하는 특징을 선보이는데 특히나 신샛별이 이를 박탈감과 불능감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음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경향이 이번 소설집 햇빛 기다리기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때문이다.”(249)

 

 1980년에 저는 연애를 했습니다. 사무실 전화번호를 알고는 있지만 전화를 해서 바로 받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받아서 전화를 바꿔줄까. 만나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할까, 공중전화 부스를 지나면서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거절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얼굴을 볼까 걱정이 앞서 차마 부스 문을 열고 들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중전화기 앞에 서서 전화를 거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전화가 연결되어도 쉽게 고백을 못합니다. 빙빙 돌려 안부를 물었고 만나자는 말을 한참을 공들여합니다. 좋다고 하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되어 그날 하루가 행복했습니다. 바쁘다며 다음을 기약하지도 않고 거절을 하면 관계의 파탄을 상상하고는 절망감을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낭패했습니다. 고백이 어긋나면 관계를 악화시켜 그나마 전화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할까 혼자서 상상하고는 전전긍긍 앓았습니다.

 

 요즘은 연애, 사랑이 한결 수월해진 것 같습니다. 약속이 잘못되어 극장 앞에서 2-3시간씩 기다리던 비극은 없어졌습니다. 누구든지 성별을 불문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쉽게 데이터를 청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눕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라고 믿습니다. 스스로 만든 억압이나 타인의 억압으로 인하여 개인의 애정행각이 불가능하거나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그런 세상은 좋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스스로 만든 억압은 스스로 풀면 됩니다. 그러나 타인의 억압은 그렇지 못합니다. 누가 감히 남의 애정전선에 참전한답디까. 불가능해야 합니다. 당신은 비규범적 주체라고 누가 감히 규정을 할 수 있습니까.

 

 최근 서울시의회에서 무슨 조례를 만들면서 성관계는 부부에 한정한다는 문구를 넣었던 모양입니다. 이 경우 서울시 조례는 타인의 애정생활에 개입을 한 것입니다.

지가 뭔데

시민의 대표란 것이 시민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 가관입니다.

 

“남색하지 말라는 성경의 구절이 동성애자를 정죄합니다. 최근 교황은 동성애가 범죄가 아니라고 강론을 했습니다만 한국은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두고 교회가 난리가 아닙니다. 남색하지 말라는 규정은 성경의 규정이지만,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도 성경에 있습니다. 남의 인생에 개입하면 업보로 고통을 받는다는 설법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할 개인의 헌법상의 권리입니다. 누가 함부로 남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동성애자가 비규범적 주체가 되어 내적 불안과 분열, 대립과 갈등을 겪도록 만드는 것은 억압입니다. 누구도 그들에게 억압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박탈감과 불능감에 시달리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그 수많은 억압을 강요하면서 화해와 통합의 극적인 여정을 강조하는 것은 폭력일 뿐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무슨 권리로 그럴 수 있습니까? 시 의원이면 가능한가요? 목사라면 가능한가요? 국가의 폭력으로 가능한가요? 개인의 사생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국가의 의무입니다. 간통죄는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이 타인을 억압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권면하는 구절일 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