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오늘묵상

QT 사무엘상 8:1-22 왕을 세워 주시오!

무주이장 2022. 5. 16. 12:48

QT 사무엘상 8:1-22 왕을 세워 주시오!

 

 사무엘이 늙어서 장남 요엘과 둘째 아비야를 사사로 임명했더니, 이놈들이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는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엉터리로 합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 사무엘에게 가서는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달라고 요구를 합니다(1-5)

 

 장로들의 생각은 다른 나라들과 같이 왕을 세우면 외국과의 싸움에서 장수가 되어 자기들을 이끌어 승리할 것이리라는 기대감이었습니다. 사무엘과 같은 사사가 지도하는 이스라엘은 나약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국방의 중요성과 병력과 무기의 개발 및 비축 등 현실의 대비보다는 하나님에게 충성을 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보살펴주실 것이라며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사사의 말은 현실의 어려움을 모르는 허황되고 추상적인 정견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에게는 장로들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임명한 아들 둘 다 사사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행동으로 이미 신임을 잃었기 때문이고, 자신이 다시 현역으로 복무하기에는 너무 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당연히 하나님에게 기도로 답을 구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라고 사무엘에게 답을 주십니다.(6-9)

 

 사무엘이 왕의 제도를 설명하면서 마지막으로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장로들에게 경고함에도 그들은 왕을 세울 것을 요구합니다. 사무엘이 장로들의 요구를 묵살할 환경이 안 되었고, 이런 사무엘의 입장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라허락을 하십니다(10-22)

 

 하나님 말고 다른 왕을 세워 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하나님이 들어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순간에 강압적으로 자기 백성을 굴복시킬 수 있었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들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 왕으로 인정받는 길을 선택하신 것’ ‘이는 버림받음으로 우리의 왕이 되신 예수님에게서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왕다움입니다라는 설명을 매일성경은 합니다. 하나님은 장로들의 요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겠다는 뜻이란 것도 아셨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부터 오늘까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실망하시면서,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응답을 하지 않겠다며 장로들에게 경고까지 하셨는데, 장로들의 자유를 인정한 것이 그들이 결국 여호와에게로 돌아올 것을 기다렸다는 설명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이 버림받음으로 우리의 왕이 되신 모습에서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왕다움이라 부연설명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쫓겨나, 자손을 낳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들의 원죄는 이스라엘 장로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여 사랑을 하시기로 정하셨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원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해서 그들은 습관적인 배신을 하나님을 상대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공의로움으로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징계도 하시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사랑해서 우리들의 왕이 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징계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다시 데려가시면서 하십니다. 그리고는 언젠가는 다시 예수님을 우리 곁으로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런 시각에서 오늘 묵상하는 사무엘의 사사 시기는 하나님이 또다시 반복하는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하여 징계를 할 것이라는 예고를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왕다움과는 달리 공의로운 하나님의 위상을 보이시는 구절이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하는 묵상입니다.

 사람의 원죄는 영원하여 항상 원죄의 굴레를 쓰고 반복된 잘못을 합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살아내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다행히 예수님의 핏값으로 우리의 신세가 나아져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행위로 인한 인과의 법칙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벌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한 인과론의 결과인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 행복한 것은 예수님을 따라 배워 제 생각과 행동이 바뀌어 원죄의 굴레에서 일어나는 잘못과 그로 인한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죄를 알기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원죄가 있기에 일어나는 잘못을 잘 다스리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율법이 아니라, 제 행동의 지침을 정하는 참고서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서린 충고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사기 시대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의 하나님과 동일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이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면 불경한 것일까요?

예스24의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