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QT : ‘묵상은 혁명이다’ 김영봉 목사님 글 다시 쓰기(글쓰기 연습)
목사님의 설교문은 몇 가지의 특성이 있습니다. 설교하려는 성경 구절에서 원어를 소개하며 뜻을 소개하는 것과 성경을 인용하여 설득하는 방법입니다. 그 사이에 본인의 주장이 숨어 있지요. 숨어 있는 논리는 좋은 글이면 쉽게 읽히고, 질서 정연하면 이해도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영봉 목사님의 글을 수정하면서 다시 쓰며 글쓰기 연습을 했습니다. 매일성경 편집부에서는 목사님에게 원고지 수를 정해 주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글이 매우 깁니다. 주로 축약을 하는 것으로 글쓰기 연습이 될 것 같습니다.
‘묵상’은 일상의 활동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머물러 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물론, 묵상의 습관이 몸에 배면 활동하면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모든 활동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머물러 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해 시간을 가지려면 일상의 활동을 멈춰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시간을 바치는 행동이다. 소설가 이승우는 ‘사랑이 한 일’에서 ‘사랑하지 않는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는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참된 묵상은 나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는 매일의 제사여야 한다. 모두에게 제한적으로 주어진 귀중한 시간을 바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머물러 앉아 성령의 조명을 받아 생각하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묵상이 된다. 생각하되 오래,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님 편에서 내 생각의 커튼을 열어젖혀 주신다. 그럴 때면 하늘이 열리는 것 같은 희열을 느낀다. 이렇게 할 경우 묵상은 혁명이라고 이름 짓기에 전혀 지나치지 않다. 다른 종교인들이 부르는 어떤 묵상이나 명상도 궁극적으로 같은 희열을 기대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묵상을 혁명이라고 정의하는 이유는 삶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삼을 때 비로소 방향이 바로 서고 질서가 잡힌다. 바울 사도는 2천 년 전에 이미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엡4:14절 기재 생략) 하나님에게 닻을 내리지 않은 존재는 상황에 의해 혹은 타락한 마음의 욕망을 따라 쫓겨 다니고 밀려다니게 되어 있다. 현대인의 삶은 이런 상황이 더욱 심해졌다. 토마스 머튼은 오래전에 이 현실을 꿰뚫어 보고 다음과 같이 썼다.
‘피상적으로 살면 우리는 우리가 진실로 원하지 않는 일들을 행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추구하고 우리 삶에 아무런 가치도 없음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을 소모한다.’ 묵상의 습관을 익히는 것은 몸에 밴 관성과 싸우는 일이며, 현대 문화와 싸우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디모데 전서 4:7)고 말했다.
부연설명이 되겠지만 묵상이 혁명인 것은 묵상으로 인해 우리의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의 마음에도 ‘에너지 보존 법칙’이 작용한다.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에너지의 총량은 동일하다. 하나님에게 우리 마음이 집중되면, 다른 욕망이 사용할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린다. 하나님조차도 공의로울 때는 공의로운 일에만 집중하시는 경향이 있지 않던가? 우리가 지은 죄를 공의로서 심판하실 때는 심판하시고, 용서하실 때가 되면 용서하시는 것은 불경스러운 예가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묵상을 통해 얻은 내적 평안에 대해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자(시편 131:1-2 기재 생략) 이것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사귐에 들어갔을 때 이를 수 있는 경지다. 하나님의 품에 든든히 안겨 있을 때 혹은 하나님의 정원에 깊게 뿌리내리고(시편 92:13) 있을 때,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삶의 방식이 가능해진다(마태복음 6:31-33 기재 생략) 이렇듯 묵상은 삶의 질과 색깔을 바꾼다.
묵상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문제에 질끈 눈 감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일로부터 잠시 등 돌리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묵상은 실천을 위한 것이고, 실천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상의 이유 외에도 방향과 방법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묵상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깊게 해 주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는 힘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진실하게 섬길 수 있게 해 준다. 묵상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정의를 보게 하고 그것을 소망하게 만든다. 그 완전하고 영원한 정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묵상은 그 미래를 보게 하고 믿게 하고 그 절대적인 기준을 위해 헌신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참되게 묵상하는 사람은 현실에 만족할 수가 없다. 묵상하는 사람은 언제나 배고픔을 느낀다.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히브리서 11:38)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 교회에 널리 보급된 큐티식 묵상은 그 나름대로 유익이 많다. 하지만 묵상을 하더라도 개인주의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에서 만족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차원의 깊은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고분고분하고 선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분고분하지 않고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며 죄악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눈엣가시처럼 되는 것이다. 깊은 묵상을 통해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정의를 보고 믿는 사람만이 이런 영성에 이를 것이다. 따라서 온전한 의미의 묵상은 이렇듯 구습에 젖은 우리의 일상에 일어나야 할 혁명이며,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혁명이고, 삶의 지향과 소명에 일어나는 혁명이다. 그리고 한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이 거룩한 혁명이야 말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온전한 혁명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끝)
목사님의 글을 글쓰기 연습용으로 활용한 것이 적절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목사님의 글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고 만만하지 않는 읽기를 위하여 저의 묵상용으로 다시 쓴 것으로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한 일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고쳐 쓰면 목사님의 주장이 더욱 선명하고 이해하기 쉬워지지는 않았나요? 그래야 묵상이 더욱 혁명적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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