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인간의 자유의지, 그리고 운명
김동호 목사님이 매일 올려주시는 날기새 설교를 자주 찾아 듣는다는 말씀은 전에 드렸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회사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집단 발생하여 여기저기 업무 펑크를 막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느라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유다의 배신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제목에 끌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공감하였고, 전에 궁금했던 부분이 일부분 해소되는 듯해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1.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인간의 원죄는 용서가 되고,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되는 복음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고, 그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을 것을 확신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피할 수 없는 배신이었다면 유다를 비난할 수 없지 않느냐는 주장을 자주 들었습니다. 유다가 하나님께 받은 임무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이고, 이런 임무를 주신 것은 원죄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용서하고, 앞으로 직접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복음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논리 전개입니다. 복음을 강조하면 유다의 행위는 운명이었고, 이 운명을 유다는 피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유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논리까지 비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예정하시고, 그것이 비록 배신이라는 비도덕적인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순종하게 하셨으니 유다를 비난할 수 없다는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럴듯하게 들리지는 않습니까?
2. 유다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을까요?
김동호 목사님은 답을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다에게도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설명하지요.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유다가 배신을 안 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목사님은 전합니다. 다른 사람 누군가가 배신을 하거나, 어떤 다른 방법에 의해서 결국 예수님은 돌아가셨을 것이고,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유죄입니다. 유다가 소명을 가지고 배신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자유의지가 선택한 배신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설명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것인데, 전 이 설명이 듣기에 편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람들을 용서하겠다는 결심만 하셨고, 그 실현 방법은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이건 창조론에도 적용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하기도 합니다. 최초의 생명을 만드시고, 나머지는 진화의 변수를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지요. 창조론을 무시하지 않는 설명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요?)
3.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순종하게 할까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필연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선과 악이 분명히 있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을 모두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 선을 악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악을 선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고 순종하는 일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배신이겠지만(그래서 성경의 자구를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하겠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문서로 받는 것도 아니고(문서로 받았다고 해도 문자가 가진 한계로 인해 해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명확하게 구두 결재한 명령을 확인할 방법도 공인되지 않았으니(말이라고 완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 순종이고 어떤 작태가 배신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사람의 자유의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러면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는 인간의 선택권에 대한 문제로 회귀하게 됩니다. 내가 선택한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하게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짐작합니다. 아무리 성경이 성령으로 기록되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라는 수단을 이용하여 기록합니다. 문자는 뜻을 전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결함을 가진 수단입니다. 사람들에 의해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성경 그 자체를 해석하는 것과 별도로 우리는 많은 사례를 연구합니다. 어떤 사람이 순종했는지, 어떤 행동이 불순종인지를 사람의 행위를 살펴보며 문자가 가진 제한성을 보완하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성경과 사람들의 개별적인 사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짐작한다는 주장입니다. 나의 자유의지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하지 않다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해석 행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비교 분석하는 의식적 행동이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가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는 노력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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