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시사in읽기 : (장정일의 독서일기) 태초에 동성애가 있었다

무주이장 2021. 3. 26. 14:29

시사in 읽기 : (장정일의 독서일기) 태초에 동성애가 있었다

 

 트랜스젠더임을 밝힌 후, 사회로부터 배척당하던 사람들이 최근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로에게 삶의 기운과 용기를 잃지 말자며 격려했던 분들이 끝내 세상을 달리했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떨칠 수가 없다. 소설가 장정일도 두 사람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시사in 독서일기란에 소개할 책과 주제를 바꾸었다고 글을 시작한다.

 

 소설가는 사르트르의 (구토)에 대해 쓰면서, 주인공 로깡탱의 구토증은 그의 동성애적 기질과 연관이 있으며, 거기서 생긴 우울증이 세계를 구토로 체험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익히 들었던 로캉탱이 어느 날 갑자기 실존의 위기를 느꼈으며, 그 배경에 실존의 위기가 있다는 동어반복을 거부하면서 사르트르가 갈리마르 출판사에 제의했던 이 소설의 원제 멜랑코리아에는 동성애적 우울증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동성애적 우울증이란 용어는 동성애자들이 사회에서 직면하는 온갖 혐오와 차별 때문에 겪는 우울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개신교 목사들이 이 용어를 별나게 사용한다고 장정일은 말한다.

 

이들은 동성애 혐오 때문에 우울증을 걸리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과 조현병에 걸린 사람들이 동성애로 유인된다고 말한다. 이들의 용법에 따른 동성애적 우울증은, 동성애가 애초부터 정신병이며, 그렇기 때문에 전환 치료가 가능하다는 주장의 바탕이 된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문학동네,2008)에서 동성애에 대한 금기는 필경 이성애적 근친상간의 금기에 선행한다고 적으며, 이 말은 문명이 근친상간 금기가 아니라 동성애 금기 위에 건설되었다는 뜻이 아닌가 반문한다. 이성애가 기본이고 동성애가 변칙이 아니라, 기본값으로 존재하던 동성애가 억압되는 과정에서 남녀 젠더가 구획되고 이성애 지배 문화가 생겨났고, 남녀의 육체성까지 이성애 지배 아래 있는 젠더 법칙을 수행한 효과일 뿐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는 버틀러는, 이성애 지배 문화에 짓눌려 애도받지 못하고 자기 내부에 합체된 동성애적 기질이 동성애적 우울증을 낳는다고 말한다며 버틀러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흔히 에로스를 승화시킨 것이 문명이라지만, 동성애적 우울증은 포기되지도 승화되지도 않으면서 로캉탱처럼 소모적인 자기혐오에 빠지거나 일부 개신교 목사들처럼 바깥으로 동성애 혐오(호모포비아)를 뿜어낸다. 로캉탱은 글쓰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결국은 승화의 길을 걷게 되지만 호모포비아에 빠진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자신들이 앓고 있는 동성애적 우울증에서 벗어날 길이 안 보인다며 안타까워(?)한다.

 

 동성애자를 정신병자로 취급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주장은 사회적 혐오를 조장한다. 사회적 혐오는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을 우울증에 빠져들게 하고 자기혐오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그 결과 그들이 원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김기홍, 변희수, 이은용 같은 사람들의 자살을 유인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호모포비아에 빠지더라도 예외인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람들은 종교인이다. 특히 예수를 사랑하고 믿는 개신교인들은 더욱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죽이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최근 자살 사건을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고 부른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음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교인 아닌 호모포비아들에 대한 비난은 들려도 그러려니 하지만, 목사들의 혐오는 그 죄가 너무도 커 보인다.

 

 소설가 장정일이 느낀 분노가 어렵게 쓴 문장 속에서 쉽게 읽혔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 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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