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글 바로 쓰기(이하 ‘우리 글’이라고 함) : 이오덕 지음, 한길사 출간
이오덕 선생(1925~2003)이 머리글에서 “이 책은 ‘우리 글 바로 쓰기’(1989. 10)가 처음 나가고부터 2년 남짓 동안에 몇몇 잡지에 연재하거나 발표했던 글과 써두었던 글을 모은 것이다”라고 썼다. 지금이 2021년이니까 말이 바뀐 세월이 한 세대 차이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변하는 속도를 감안하면 선생이 쓴 글이 시대에 뒤처졌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읽고, 글을 수정한 후 비교해보면 선생의 말과 생각이 틀림없음에 깜짝 놀란다. 매번 옆에 두고 읽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렇지 못하니 이렇게 한 꼭지씩 요약하면 공부하는 방법이 되어 기록하여 나눈다.(두 번째)
‘우리가 가야 할 길’과 ‘우리의 가는 길’
‘나를 찾아가는 길’과 ‘나에게로 가는 길’의 차이는 당연한 우리 말로 된 제목과 외국말법 따라서 유식하게 쓴 것의 차이임. 답은 먼저 제시된 글이 우리 말로 된 제목이라 함.
(한기)12월호의 뒤표지 안쪽에 나온 시다.
연인의 마을
서까래 밑으로 쌓여진 굳어진 눈도
지붕 너머 포플라나무 중간에 얹혀진
까치집도
등성이도
공동묘지도
연인의 흔적이다
선생의 지적은 통렬하다. “눈이 서까래 밑으로 쌓인다는 것도 내 머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그것보다 이 짧은 시구에 나오는 몇 개의 움직씨가 모두 입음꼴(피동형)로 – 그중 두 개는 입음꼴을 또 한 번 입음꼴로 – 만들어놓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중에서 “굳어진”은 그대로 써도 될 것이다. 그런데 쌓여진, 얹혀진은 안 된다. 시라고 해서 우리 말법을 벗어나 쓸 수는 없다. 아니 시야 말로 우리 말을 가장 잘 살려 써야 한다. 이렇게 함부로 입음꼴을 쓰는 것은 일본글을 따라서 쓰기 때문이다. 연인이란 말도 일본식 말이다."
정인(情人)의 마을
추녀 밑으로 쌓인 굳은(굳어진) 눈도
지붕 너머 포플라나무 중간에 얹힌
까치집도
등성이도
공동묘지도
정인의 흔적이다
*서까래 : [건축] 지붕판을 만들고 추녀를 구성하는 가늘고 긴 각재.
남의 작품을 선생은 지적만 했지만 내가 선생의 지적한 글을 바꾸어보았다. 어느 쪽이 맛깔스럽나?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떨까? 남의 작품을 바꾸는 것은 무례할 수도 있지만 선생이 “시일수록 우리 말을 가장 잘 살려 써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했다.
사족 : 서까래는 방에서 볼 수도 있고, 집 밖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집 밖에서 보는 부분을 우리는 추녀라고 부른다. 굳이 서까래라고 주장해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추녀라고 하면 이해가 쉽다. 눈이 쌓인 부분은 추녀 아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광고문
현대 의학의 발달은 불치의 병으로 불리웠던 암도 조기검진을 통한 치유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현대는 의학이 발달해서 불치의 병이라고 말하는 암도 일찍이 검진을 해서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선생이 고쳐쓴 글입니다)
현대 의학의 발달은 불치의 병으로 불렸던 암도 조기검진을 통한 치유가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고쳐쓴 글입니다. 조기검진과 치유(치료)는 거의 의학용어로 일상화된 것으로 보여서 우리 말법이 아닌 “불리웠던”을 고치고, “현대 의학의 발달은…치유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 어법상 이상하여 ‘현대 의학의 발달은…치유가 가능하게 만들었다’로 바꿨는데 이렇게 바꾸는 것이 저는 편하게 들려서 그렇습니다. 제가 우리말법에 초보자라 잘못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미아와 잃은 아이의 차이
선생이 우리 말이 아닌 ‘미아’란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 외에 내 귀를 솔깃하게 하는 주장이 있다. “놀이터나 시장이나 길에서 아이를 잃어버리는 사건은 어떤 경우에도 그 부모들이 게으르고 어리석고 무지해서 생겨나는 비극이다. 이런 어른들의 게으름과 어리석음과 무지함은 바로 ‘잃은 아이’라는 우리 말을 쓰지 않고 미아란 말만 쓰고 있는 태도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말은 우리가 가진 생각의 뿌리에서 나오는 열매이다. 말이 거칠면 심성이 거친 것이고, 말이 성급하면 급한 성격이 나타난 것이다. 선생의 ‘미아란 말을 쓰는 이유는 어른들의 게으름, 어리석음, 무지함을 변명하고 덮으려는 태도’라는 주장이 가슴에 닿았다.
‘생활하수를 재활용하자’와 ‘버리는 물 다시 한 번 쓰자’의 차이
10글자 대 10글자 차이가 없다. 그런데 확 닿는 느낌은 뒤가 개운하다. 옛날 공부할 때 선생님의 가르침을 노트할 때는 앞을 사용했다. 선생님이 ‘버리는 물 다시 한 번 쓰자’고 설명하면 ‘生活下水 再活用’이라고 했다. 한자는 갈겨쓰도 알아보기 쉬워 한글 메모보다는 한자쓰기가 쉬웠다. 하지만 표현은 뒤가 훨씬 쉽고 깔끔한 것 같다.
주민들이 마구 버린 폐비닐과 공병 등 각종 쓰레기가 널려 있다
폐비닐은 ‘폐종이’ ‘폐옷’ 할 때 말이 안 되듯이 잘못 쓰는 말이고, 더구나 “버린 폐비닐”은 겹으로 쓴 말이 되었다.
마을사람들이 마구 버린 비닐과 빈병 따위 여러 가지 쓰레기가 널려 있다.(4자가 추가되었군요. 신문에 인쇄할 때 글자수 제한이 있는 경우는 이렇게 쓰는 것까지는 양보하겠다.)
주민들이 마구 버린 비닐과 빈병 따위 여러 쓰레기가 널려 있다.(이건 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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