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랴 우리는 그렇게 담금질 당하며 자란다.
글의 제목은 주간지의 책 소갯글에서 나온 말이다. 김환영이 짓고, 낮은산이 펴낸 ‘따뜻해’란 그림책을 소개하면서 김서정이 말하는 것이 ‘어쩌랴 우리는 그렇게 담금질 당하며 자란다’라고 위로한다. ‘따뜻하지 않아서 따뜻하고 싶은 아이의 절절한 심정을 전해준다’며 희망을 버리지 말 것을 충고한다.
나도 현실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판타지에 들어가 현실을 피하고 미래를 꿈꾸었던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고백을 할 수 있다. 무슨 요량이 있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고, 사회변화를 예상하여서 참아낸 것도 아니다. 그저 힘들어서 피했던 것이다. 그때의 현실은 참 더디게 흘렀고, 변화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뒤돌아 과거 내가 딛고 있던 현실과 지금의 현실을 비교하면 참 많이도 세상은 변했구나 하고 놀란다. 여전히 여성은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인종차별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변화는 긍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체험했다. 늙은이의 과거 삶이 지금의 청춘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의 청춘들의 삶의 조건이 오히려 부럽다. 단지 남의 떡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럴까?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희망을 가지고 살기 바란다. 어려울 때면 잠깐 판타지에 들어가 소낙비는 피하기 바란다.
로버트 드 니로가 뉴욕예술대학(NYU TISCH) 졸업식에서 한 명연설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삶이 응축된 경험과 지혜를 졸업생들에게 들려주는 그의 연설을 들으며, 감탄한 기억이 난다. 오늘 다시 그의 연설을 유튜브를 통해서 보고 들었다. 유행이 초 단위로 바뀐다는 세상이라지만 5년 전의 연설은 여전히 유효한 팁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룬 성과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앞으로 수천 번의 거절을 경험하게 될 젊은 예술인들에게 전하는 말이 연속해서 사람을 웃기고 생각하게 하고, 결심하게 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태초 이전에 나를 선택하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티격태격 같이 컸던 동생이 사고로 죽은 뒤 느꼈던 절망감도 하나님이 예정하셨던 것이고, 살면서 느꼈던 허무감과 때때로 찾아온 삶의 희열도, 결혼생활과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꼈던 기적 같은 삶의 조각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미 뜻하시고 내 편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였다는 것을 믿게 되면서 느낀 놀라움이었다.
‘씨발이 축복이다’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오늘 주신 어려움이 나중에 축복이 되더란 말이다. ‘어쩌랴, 우리는 그렇게 담금질 당하며 자란다’는 말과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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