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콘권을 둘러싼 정쟁 – 말과 행동의 부조화
최근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있었다. 병실에는 따로 텔레비전이 비치되어 있지 않아 휴게실에서만 시청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리모콘을 사용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미 정해진 채널을 그냥 무심히 볼 뿐이다. 지루한 병원생활과 자신의 비참한 건강 상태에 지친 분위기이니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내가 리모콘을 잡아서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겠습니다” 혼잣말을 하고는 채널을 돌렸더니, 다른 환자와 얘기 삼매 중이었던 나이든 여자 한 분이 자기가 보고 있으니 돌리지 말라고 하더라. 뉴스가 방송 중이었고, 상대가 나이 드신 여자분이라 보지 않고 있다는 나의 선입견으로 인한 사고였다. 얼른 채널을 원래 방송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뉴스에서 나오는 한 꼭지의 보도를 보고는 옆의 다른 환자에게 흥분하여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현 정부와 현재의 시국에 대한 비분강개가 대단하였다. 드디어는 텔레비전의 아나운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조금 조용히 얘기하시죠”라고 얘기했다. “왜요?”라면서 나에게 이유를 묻는 품새가 매우 도전적이었다. “목소리가 너무 크셔서 텔레비전 소리가 안 들려서요” 내가 다시 대답하자 잠깐 나를 보고는 “알았어요” 대답하고는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비분강개는 목소리 톤이 높아야 효과가 나는 법인데 목소리를 낮추니 별 재미가 없는지 곧 두 사람의 대화는 끊어졌다. 한참 뉴스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부인이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를 지켜보던 아내가 나에게 조용히 하는 말이다.
“남이 자기 의사를 묻지 않고 채널을 돌린 것에 항의하던 사람이 자기는 남의 의사를 묻지 않고 말없이 채널을 바꾸는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를 거야.” 나에게 조용히 한 말이지만 불과 2-3미터 떨어진 그 부인이 조용한 휴게실에서 못들었을리 없었을 것이다.
“듣겠다. 말 한다고 고쳐질 사람은 아니야.” 내 말도 들렸을 것이다.
현 시국에 분한 마음을 표현하며 전투의지를 북돋는 분들이 많다. 특히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이 더욱 그렇다. 그런 분들의 말에는 자기를 돌아보는 말들이 없는 특징이 있다. 모두 남들이 어떻다는 비난 뿐이고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는 태도는 없다. 우린 그런 세월에 반항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제 젊은이들은 그런 세월을 인정하지 않고 수용하지도 않는다.
나는 내가 꼰대라는 말을 들을 때면 한편으로는 섭섭하지만 세상이 우리 때와 다르게 변한다는 것에 대해 만족한다. 우리보다는 요즘의 젊은이들이 훨씬 똑똑하다고 믿는다.
군대에서는 제대말년의 군인을 폐참이라고 한다. 나는 나의 폐참생활을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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