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유령이 나오고 악령이 나오고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무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유령이 나와 닮았고, 악령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고, 귀신이 낯이 익으면 무서운 이야기가 됩니다. 인간 내면에는 여러 인간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저 그런 이야기로 듣다가 어느 날 문득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교교한 달빛 아래, 느티나무 그림자 밑에서 숫돌에 칼을 갈아 칼날이 설 때처럼 시퍼렇게 살아나면 보고 싶지 않은 다른 나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그게 유령이고 악령이고 귀신이라는 생각이 들 때 무서운 이야기가 됩니다.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읽고 비가 오는 밤마다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지나 집으로 와서 매번 반복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늘 밤도 카페에서 술집에서 길바닥 시위장소에서 반복해서 들려옵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별이 없는 이야기가 진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정보라만큼(?) 스티븐 킹도 무서운 이야기를 잘하는 이야기꾼입니다.
제조사와 연식이 불분명한 스테이션왜건이 사람들을 잡아먹는 이야기는 뜬금포 같은 이야기로 넘길 수도 있지만 스테이션왜건이 출현할 때까지 천연덕스럽게 피터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이어가는 그의 술책에 호기심을 키우면서 결국 사람 먹는 차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맙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는 무섭지가 않습니다. (130킬로미터)
프리미엄 하모니라는 싸구려 담배를 사러 가게로 들어간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은 뒤 남편이 들려주는 사고 당시 아내의 이야기. “담배 끊어”와 미니 케이크인 “리틀 데비를 끊어” 같은 다툼이 일상이 된 부부의 이야기. 아내가 죽고 “병원으로 가는 내내 차 안에서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세게 틀고 담배를 피”우는 남편은 무엇일까? 이놈이 악령이다. 고함을 지르고 싶지만 도처에 성별을 달리하고 숨 쉬는 수많은 악령들의 저주를 견딜 수 있을까 걱정과 함께 입을 닫습니다. (프리미엄 하모니)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아들이 보이면 이들에게 함부로 대들지 않으시는 게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입니다. 죽은 아들과 산 아들조차 분간 못하는 아버지는 접촉사고로 생긴 분쟁에서 아들을 구합니다. 아들을 대신해 보복한 부정(父情)은 형사법을 부정(不正) 합니다. 스티븐 킹이 주는 쾌감입니다. ‘그렇다고 죽이기까지야…’ 이런 생각하면 이야기꾼을 꿈도 꾸지 마세요. (배트맨과 로빈, 격론을 벌이다)
다가오는 죽음을 쓰는 모래언덕(작가가 관심을 가지는 미래 예측 주제입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못된 꼬맹이의 존재에 대한 복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해와 편견이 판치는 형사법정과 살인자의 이야기는 관습적인 틀을 벗어납니다.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형수의 저승똥에서 발견되는 사라진 은화 한 닢이 남긴 반향이 똥냄새와 함께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음) 전설로 전해지는(저는 초등학교 시절 소년중앙을 통해 들었습니다) 코끼리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의 이야기 (납골당)은 제 구미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삶의 기반을 만들까? 도덕성이 무너지면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날까? 평생을 도덕성에 얽매이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스티븐 킹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설명합니다. “그거 함부로 무시하면 안 돼!” (도덕성) 사후세계는 얼마나 독특할까? 작가는 별 것 없다고 시큰둥하게 얘기합니다. 왼쪽문을 선택하면 다시 한번 똑같은 삶을 윤회할 것이고, 오른쪽 문을 선택하면 네 얘기는 모두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기시감을 느끼는 걸까요? 누구도 오른쪽문을 선택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후세계)
미래를 안다는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미래를 바꾸는 것은 범죄일까 선행일까? 이 주제는 스티븐 킹이 관심을 가졌던 주제입니다. ‘11/22/63’은 케네디의 암살을 알고 이를 막으려는 이야기입니다. 끝이, 정말 마지막 조금의 끝이 흐릿해서 실망을 아주 조금 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여러분들은 미래를 알고 예정된 사고를 막으려는 노력을 어떻게 판정하겠습니까? 저의 기대와 달리 작가는 절대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초점이 흐려진 게 아닌가 오해도 했지만 오히려 세상을 관통해 보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변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광이 지배를 철’해도 그의 이야기를 미리 예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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