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아내가 가고 아내를 따라 제가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신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불편했던 젊은 시절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숱한 세상사를 만납니다. 운칠기삼이 단지 노름판의 격언이 아니라면 신의 도움을 받아 사는 것이 비난받을 일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을 준비하게 하셨다”는 순장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죽음의 문턱일 수도 있었던 삶의 고비가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못했거나, 지금의 나조차도 될 수 없었을 가능성의 고비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동생이 갑자기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믿음은 믿음을 기반으로 큽니다. 믿음이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저에게 믿음은 성경의 말씀으로부터 온 게 아니었습니다. 제일 먼저 경이로움을 느낀 것은 일대일 양육과정을 지도하는 순장님의 성실함과 때론 무례한 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관대하게 대하시는 너그러움을 목도했을 때였습니다. 예수를 따라 배우는 사람에게서 예수님을 본 듯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신 지옥’을 외치던 신도들, 차별금지법을 차별하는 목사들, 빤스 목사의 기억이 스르르 희미해졌습니다.
종교는 믿는 이에게 경이로움을 줍니다. 저의 경우 이런 경이로움은 과학책을 통해서도 느낍니다. 알지 못하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경이로움은 신을 처음 알던 때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우주의 탄생, 얼음지구, 공룡의 멸종을 증거를 통하여 설명할 때 자유롭게 반문을 하고 반증을 찾으며 증거를 확인하는 과정의 경이로움은 순종만을 강조하는 신학과는 다른 경이로움이었습니다. ‘배우고 익히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즐거움은 열락, 경이로움의 다른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1985년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열린 자연 신학(이성이나 자연에서의 경험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신학의 한 분야라고 합니다)에 관한 기포드 강연에 칼 세이건이 초청받아했던 강연을 앤 드루얀이 정리한 책입니다. 과학의 경이로움과 신학의 경이로움을 다툼으로 논쟁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입장이 만날 수도 있다는 점을 과학적 시각으로 설명합니다. 강연자가 설명하는 내용이 그대로 수강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설정입니다. 저와 같이 초신자의 경우는 그의 설명이 귀에 쏙 들어왔고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에 정리한 질문과 답변을 보면 많은 청중들은 그의 강연을 비판적으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논쟁거리로 만들어 강연의 무게감을 줄이려는 시도도 읽혔습니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닙니다”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신이 부존재한다는 정의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의 강연은 줄곧 증거가 없다면 따로 이야기할 주제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스스로 증거를 제시하고 제시된 증거가 다른 사실로 밝혀진 증거들과 오류가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의 존재를 내면적 믿음이 아닌 과학으로 증거 하려면 증거를 제시하여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을 합니다. 창조과학이라는 유사과학으로는 무오류의 증거를 제시할 수 없습니다. 신학이 과학의 이름으로 불리려면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사과학이라 점잖게 불리지만 사기행각에 불과합니다. 제가 알던 목사님은 창조과학을 접하고 “도전을 받았다”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서 도전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도 모호하지만 그 도전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리라는 믿음은 평소 저의 생각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실존 인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부처도 마호메트도 역시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역사적 실체이지만 그들의 삶과 임무는 지지자 또는 적들에 의해 훼손된 부분이 있다’고 그는 설명합니다. 이해가 되는 설명이지만 성경의 기적까지 주장이 이어지면 과학과 신학의 경계선이 생깁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 예수님의 생애 첫 기적부터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내는 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까지 우리의 믿음은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이라고 증거로서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성경의 기적을 믿음으로 믿음을 굳건히 하며 제 삶의 일상을 다질 뿐입니다. 사랑으로 살 수 있길 바라며 기도합니다. 이 기적이 과학적 증거로 증명이 가능하다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믿을 뿐입니다. 그 믿음으로 저의 삶이 바람직스럽게 변하길 바랄 뿐입니다. 제 믿음에 과학적 근거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는 믿음은 과학과 신학이 이웃으로 서로 존재를 인정하며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중세의 기독교가 사회에 끼진 해악이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기독교가 근거 없이 행한 해악들은 발을 딛지 못한 채 유령처럼 부유할 뿐입니다. 과학이란 이름은 자연과학을 넘어 인문과학에도 붙었습니다. 과학의 증거를 바탕으로 인간사회를 풀이하고 이해하며 삶을 엮자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자연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과학이라는 이름을 잃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이 정도의 자신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존재나 외계인의 존재,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이 우리 삶에 풍요를 주려면 증거에 기반한 대화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진실과 진리를 향한 인간의 노력은 신학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협하다고 믿습니다. 모든 믿음(학문적이든 신학적 주장이든)은 한계가 있습니다. 전지 전능한 신을 전제로 신학은 무결점이며 신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으며 신이 세상을 온통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은 한계를 부정하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함이 있다고 해서 사랑과 봉사와 위로와 연대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벽하다는 독단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믿는 전지 전능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인데, 어찌해서 광화문과 여의도의 하나님이 다른 얼굴과 다른 성품과 다른 주장으로 나타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한길과 손현보의 하나님과 전광훈의 하나님은 애초부터 증거가 없는 유사 하나님일 가능성이 크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서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만 들으면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적절한 증거를 제시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그들이 제시한 증거가 오히려 그들의 주장이 아예 터무니없음을 증명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칼 세이건의 강연은 경이로움을 공유한 과학과 신학의 공존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과학의 경이로움은 다른 게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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