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장편소설. 박소현 옮김. 다산책방 간행

무주이장 2025. 3. 19. 13:36

 벌써 먼 옛날이 된 듯한 3년 전, 개인적으로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던 시절을 느꼈던 사건들이 몇 있었습니다. K-POP이 세계 여기저기에서 불리고, 그들이 공연하는 곳에서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한국계 미국작가의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고 언론이 난리였습니다. 드라마부터 챙겨보고 책을 읽었습니다. 문학적인 면에서는 파친코에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에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김민하 배우의 연기를 보며 지독한 일상을 꿋꿋이 살아내는 끈질김에 감탄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김민하 배우는 그 후 '조명가게' 드라마에서 다시 봤습니다. 다시 보니 반가왔습니다)

 

 근대의 굴곡진 역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디 한 분야라도 빠짐없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그때 그 시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파친코의 주인공들이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서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을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소개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떠들썩해진 이유는 미국이라는 주류 국가에서 또 다른 주류 국가였던 일본제국주의시절 폭력이 과거부터 지금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한국계 미국 작가가 알렸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작 평화의 소녀상하나 설치하여도 경기를 일으키며 일본 정부가 나서 방해하는데 미국 작가가 일본의 만행을 이야기책으로 내고 드라마로 만들어져 OTT망을 통해 전 세계에서 공개해도 꼼짝하지 못하는 것에 정치, 사회적으로 흥분한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비주류의 이야기가 주류의 무대에 소개되는 것 자체가 선진국 한국임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한국을 이해하고 우리 민족이 고통받았던 역사를 소개하는 미국 작가에 대하여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물며 한국계일진대. 과거 정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되지 않아 실망을 하던 우리로서는 한국계 미국 작가의 이야기가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에 감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중음악과 영화와 드라마에 이어 문학에서의 선진국이 된 이야기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으로 더해졌습니다.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우리 작가가 세계인이 공감하는 이야기를 썼다는 공식적인 인정에 모두가 감격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선진국민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한 사건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미국 작가 김주혜의 데뷔작이라고 합니다.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1918년부터 1965년을 관통하며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대하소설 같은 형식을 보이지만 등장인물이 한정적이고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사건들의 구체성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젊은 작가가 그것도 미국에서 살았던 작가가 한국의 근대사를 공부하여 600쪽이 넘는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그의 노력과 그의 필력을 인정해야 할 듯합니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이 든 우리의 생각과 다른 근대인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여성입니다. 그 당시의 여성은 전근대적일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선입견이 조금씩 어긋났습니다. ‘작가가 젊고 여성이라서 그럴까?’ 책을 읽는 내내 질문을 했습니다.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쿨한 근대 여성을 만난 쾌감이라고나 할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 그 시절이라고 쿨한 여성이 없었겠어?’ 그러다 보니 근대사의 굴곡이 가슴을 억누르는 정도가 덜했습니다. 젊은이들의 과거를 받아들이는 감각을 알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눈물 콧물 뚝뚝 떨어지는 신파로 흐르지 않는 우리의 이야기가 이 책에 있습니다.

 

 톨스토이 문학상이 어떤 상인지 검색에 실패했습니다. 2024년에 수상을 했다는 문구가 선명합니다. 대단한 문학상이길 바랍니다. 그러지 않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세계인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는 것에 다시 한번 선진국민이 된 증거가 하나 더 생겼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원서로 읽는 수고를 해볼까 생각하다 그만둡니다. 안정효 작가의 하얀 전쟁을 영문판으로 구해 읽었던 수고가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을 포기하는 지혜가 이제는 생긴 듯합니다.

 

 사족이지만 작은 땅에 더 이상 야수들로 살지 않길 바랍니다. 작은 땅에서 모진 역사를 이겨내 꿋꿋하게 살아내는 불굴의 야수로 살기보다는 민주적 시스템 내에서 민주와 평화와 인권과 연대를 같이 숨 쉬며 그냥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대하진 않더라도 만 명 만을 위한 법이 판치는 세상은 걷어차고 살고 싶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야수까지 될 필요가 없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역사가 살아 오늘을 살리길 바랍니다.

내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