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마음에 없는 소리. 김지연 소설. 문학동네 간행

무주이장 2023. 10. 17. 16:47

 현실을 사는 힘은 어떤 종류일까요? 정치적 권력을 쥔 대통령이 귀 닫고 눈 감고 오직 입만 열어 내가 왕이다” 큰소리칠 수 있는 힘이 현실을 사는 힘일까요? 아니면 그런 대통령과 그의 수하들에 대항하여 압수수색을 당하고 수사를 받아도 하고 싶고, 해야 할 말을 하는 힘이 현실을 살아내는 힘일까요? 그렇게 뉴스가 되는 힘만이 현실을 사는 힘이라고 믿어도 될까요? 일상을 사는 우리들은 어떤 힘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김지연의 소설을 해설한 문학평론가 강지희는 현실을 사는 힘을 두 개의 농담이라고 풀었습니다. “자신의 진솔한 마음이 노출될 위기 앞에서, 때로는 상처받은 마음을 감추기 위해 빠르게 농담의 외피를 입는다.”라고 두 개의 농담 중 한 개를 설명합니다. “현실을 살면서 솔직하게 다 표현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미련과 슬픔이 만들어내는 환시와 환청 속에 잠겨 이에 대해 계속 말해야만 살 수 있는 사람”, 강지희가 해석한 김지연의 소설 주인공들의 농담은 무력해 보입니다. 이 농담만으로 세상을 살면 우리는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는 것이 됩니다. 사는 것과 견디는 것은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농담은 무엇일까요? “공고한 현실 질서에 구멍을 내고 사건이 지닌 무거움을 증발시키는 농담입니다. “물리적 세계의 굳건한 실재성을 무너뜨리고 현실의 여러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에, 가벼운 액체성과 부유하는 기체성의 이미지와 닮아있는 농담이라고 설명합니다. 현실이 주는 여러 압력은 실재하지만, 이런 현실을 이기는 힘은 부유할 정도로 가볍다고 합니다. 현실의 실재하는 압력을 견디는 부유할 정도의 가벼운 힘이라니요? ‘농담이라는 단어가 소환된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만 이 농담은 현실을 비껴 우리의 삶을 조금은 부드럽고 유연하게 풀어낸다고 주장합니다.

 

 김지연 소설의 주인공들은 지방에 근거지를 둔 삼십 대 미혼여성이거나, 레즈비언, 안정된 직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고단함을 이기는 방법은 진지하게 토론하고, 치열하게 투쟁하고, 머리끄덩이 잡고 눈 부라리며 싸우는 게 아닙니다. 대놓고 싸우지 못한 채 일상에 지쳐 찾아온 피곤함은 환시와 환청을 부릅니다. 이것 만으로 사람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은 어떻든 자기 존재를 위한 묘수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충격적인 물리적 세계의 사건 들 앞에서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일, 각도를 살짝 기울여 환상에 침투해 들어가는 일이다.” 어려운 말입니다. 이 어려운 말을 이해하려면 김지연의 소설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김지연의 방법(강지희의 해설에 작가가 동의하는지 알지 못하지만)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노래는 반주에 맞춰 불러야 제 맛이지 반주에 뒤쳐지면 듣기에 고역이고, 항변은 솔직하게 다 표현해야 속이 시원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쩌면 현실을 살면서 이러지 못했던 저의 환청이고 환시일 수 있습니다. 때 놓친 항변은 변명이 되고, 변명은 설명을 요구하고, 설명은 구차합니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고, 만나기 싫고, 꼴도 보기 싫습니다. 이쯤 되면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경심술(?)을 부려 마음을 가볍게 할 농담이 현실의 생존 전략이 됩니다. 이처럼 현실을 사는 힘은 정신 승리뿐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김지연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의 첫째 농담에 너무 눈이 갔던 것 같습니다. 고구마를 먹다 목이 막힌 듯 답답했습니다. 먼저 강지희의 해설을 읽고 소설을 읽었다면 달라졌을까요? 현실을 사는 두 번째 농담을 익히지 못한 저는 그랬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젊은 소설가가 보는 세상이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제가 살았던 세상보다 많이 좋아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든 생각입니다.

'웬 세상이 이리도 더디 변할까요?'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