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로울 게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작가는 반성합니다. 아버지가 죽어야 딸은 반성을 하는 것일까요? 아님, 아버지가 죽어야 아버지에게 생전에 표현 못한 반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세상사 모든 이야기는 새로운 게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어떤 이야기에 다른 경험담이 겹치고, 그래서 얼핏 새로워 보이지만 기존의 이야기를 편곡하거나 변주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제 다시 찾아본 영화는 정지아 작가가 소환한 영화입니다. Daniel Wallace의 원작 ‘Big Fish’를 각색한 동명의 영화입니다. 여기서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불편합니다. 아들은 자신의 결혼 피로연에서 아버지가 경험을 각색해서 장황하게 얘기를 하는 것이 분위기 파악도 못한 채 자아도취에 빠졌다고 짜증을 냅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아버지에게 ‘우주의 중심’에 선 듯한 착각을 하지 말라고 아들은 말합니다. 사실 아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이야기를 사실로 믿다가 나이 들면서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자 아버지가 미워졌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이 그저 ‘뻥’이라는 것에 그것을 사실로 믿은 아들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게 아니라고 속을 얘기하지만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설명이 ‘변명’으로 들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임종을 맞이하면서 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에 아버지의 요청대로 자신이 어린 시절 들었던 진짜 같은 거짓말의 내용들을 회상하며 각색을 해서 들려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향의 강에서 ‘빅 피시’로 변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빅 피시’였다고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하는 문상객 속에서 아버지의 젊은 시절 동고동락하였던 사람들을 맞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비록 각색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거짓말이 아닌 것을 그때야 비로소 확인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애증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익히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핏줄과 함께 시대의 질곡이 등장하지요. 삶의 조건이 또 다르지요. 사람은 하나의 작은 우주라고 했던가요. 사람마다 생각도 꿈도 포부도 욕망도 욕심도 소망도 다 다르니 이런 조건들을 이리 모으고, 저리 떼어놓으면 이야기는 무궁무진해집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작가는 창작하느라 몸살을 하고 독자는 재미있니 없니 칭찬과 불평을 합니다. 그런 칭찬과 불평도 사람마다 다르지요. 우리가 아직도 이런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고 눈물 흘리기도 하는 것은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루하루 살아낸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가요? 오늘도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원곡도 편곡도 변주곡도 비슷한 듯 다른 이야기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정지아 작가는 우리와 무엇이 달라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잘 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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