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울 것 없을 것 같은 세상 이야기들.
많은 작가들은 ‘창작의 고통’을 얘기합니다. 창작물을 만드는 과정이 힘들다는 얘기일 터입니다. 하지만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세상사 모든 이야기는 새로운 게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어떤 이야기에 다른 경험담이 겹치고, 그래서 얼핏 새로워 보이지만 비유하자면 기존의 이야기를 편곡하거나 변주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고 이런 편곡이나 변주가 쉽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으려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중구난방 언어를 연결한다고 해서 이야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언어에 대한 개념이나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아’와 ‘어’의 어감도 민감하게 느끼는 감수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창작은 그전에 준비를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수신하는 안테나를 민감하게 설계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제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일본 영화를 봤습니다. 10년에 걸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익히 듣고 보는 이야기입니다. 2003년 개봉된 영화라서 이야기가 지금 보면 더욱 식상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예상되는 이야기, 뻔한 주인공들의 갈등에 지쳐 몇 번이나 자리를 떠나서 물도 먹고, 커피도 끓이고, 간식도 챙겨 먹고는 다시 화면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이런 저의 반응으로 판단하면 이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편곡이나 변주가 잘 된 것도 아니지요. 그렇다는 말입니다. 영화를 선택한 저를 탓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정지아 작가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새로운 이야기 같아 읽는 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소개하는 글은 소설이 이렇게 시작된다고 소개합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글의 시작이 아버지의 죽음을 어쩌면 잘 죽었다는 듯이 가볍게, 저런 죽음을 예상했다는 듯이 놀라지 않고, 세상 살 땐 진지하더니만 결국 저렇게 우습고 황당하게 죽었냐는 조롱이나 놀림이 느껴지는 표현으로 오해할 정도입니다. 세상 어느 부녀관계가 항상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원수가 된 부녀도 많지 않습니까? 영원히 원수는 아니더라도 사춘기의 딸이 난동을 부려도 입 한 번 뻥긋 못하고 죄인이 되는 경우를 한 번도 당하지 않은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어제 본 ‘스틸와터’ 영화에서도 아버지는 딸 앞에서 죄인과 가해자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합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이렇듯 가시고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습니다. 강한 아버지, 그래서 딸에게 상처를 주는 아버지는 불행해야 한다는 인식이 상식이 되었습니다. 나쁜 아버지는 재벌집에나 있는 아버지로 희귀종이 되었습니다. 부녀 간의 사랑은 지금도 숱하게 변주가 되는 주제입니다. 정지아의 소설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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