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중 생기는 불순종1
마르틴 루터가 신약성경 로마서의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구절을 수년간 붙잡고 늘어진 끝에 그의 갈증은 일거에 해결되었다.[18] 점점 "인간이 어떤 선행을 한다거나 자신의 힘으로 죄를 씻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다[19]."는 생각을 점점 굳혀나갔다.[20](나무 위키 “마르틴 루터 중에서)
종교개혁의 발동을 건 마르틴 루터가 화두로 잡은 구절은 신약성경 로마서의 1장 17절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종교가 타락한 행태를 보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을 것 같다. 성직자가 면죄부를 팔면서 세속의 욕심을 채우는 돈을 마련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저들의 믿음이 옳은 것이냐를 고민한 것이다. 그러다 깨우친 것이 면죄부를 사는 등의 선행을 하거나, 자신의 돈으로 죄를 씻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생각을 굳혔다는 설명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있으니 전체 신도의 일부인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인 독일어성경을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칭의’라고 하는 모양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에 대해 로마 가톨릭이 퍼부은 공격과 비난은 칭의론이 성화 없는 구원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성화’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따라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구교는 면죄부를 사는 등의 행위가 성화라며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종교개혁자들은 성화를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의 속내를 간파하고 이에 반대되는 해석을 했을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같은 개념이다는 주장이다. 시대상황은 이쯤으로 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조물주로서 창조한 피조물이다. 이들은 선악과를 빼고는 모든 자유를 만끽하는 동산에서 선악과까지 욕심을 냈다. 피조물이 조물주의 영역인 선악의 판단까지 욕심낸 결과 우리 인간들은 원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한 여호와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자기를 믿는 의인이 되라고 했지만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왕래하는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은 여호와를 완전히 따르지 못하는 행동을 자주 감행했고 여호와는 그때마다 그들을 벌했다.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그가 제자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끝내 유대 종교 지도자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다. 하나님은 그 의미를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죄를 그의 아들을 대신 죽이면서까지 용서하는 거룩한 사랑을 베풀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대속’이라는 개념이다.
원죄를 가졌던 인간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속량을 받았다면 우리의 원죄는 이제 사라진 것일까? 비록 속량을 받았다고 하지만 인간의 원죄는 죄성으로 남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일까? 믿음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자가 다시 믿음을 상실하면 올바른 사람이 아닌 것으로 반대해석이 가능한데, 올바르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과연 의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해진다.
불교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통(기독교의 원죄)을 안고 산다면서 이 고통에서 해탈하는 과정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부처의 본성(하나님의 복음)을 수양(칭의와 성화)을 통하여 발현(구원)시킨다는 것이다. 이로써 생로병사의 고통(인간의 원죄와 죄성)을 소멸시켜 희로애락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원죄를 사면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생각과 행위는 불교의 수양과 같은 뜻의 다른 말이다. 교회를 규칙적으로 다니며 인간의 죄성을 풀어내고 육신을 따르려는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으로 순화시킨다면 수양을 통하여 부처의 본성을 발현시키려는 행위와 차이가 없지 않을까? 불교는 자기가 만든 습의 인연에 매달려 부처의 본성을 깨치려고 하다가도 본성을 망각하게 된다고 한다. 자기가 만든 습관이라는 것이 인간의 죄성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렇게 유사성을 가진 두 종교의 가르침에서 유독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개신교의 선교와 불교의 포교 태도라고 생각했다. 법륜스님은 늘 남의 인생에 개입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다. 자기의 짐도 벗지 못해 쩔쩔매는 중생이 남의 짐을 대신 지겠다는 마음만으로는 둘 다 수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당연히 자기의 수양에 무게를 더 두라는 말이다. 개신교는 자기의 수양보다는 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좋다는 소개를 하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알았다. 실제 주위에서 교회를 가자는 권유는 많이 받았다. ‘불신지옥’을 강조하는 선교활동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있지 선교하는 개인의 성품과 믿음의 정도는 빠져있다. 자기 스스로 개신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듯 보이는 사람들이 남에게 선교하는 행동이 공격적이고 오만하게 보였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도 제대로 하나님을 믿지도 못하면서 선교를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제자훈련이나 전도교육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온전히 받은 사람을 양성하려는 노력이 그 증거일 것이다. 피조물인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얻은 평화가 있다. 하나님이라는 확실한 ‘빽’이 생겨서 과거에는 많았던 두려움이 줄었다. 이제는 규칙적으로 성경공부도 한다. 읽을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성경 속에 그 이상의 생각거리가 있는 것도 좋다. 인생을 살면서 돈이 주는 편리함과 충족감이 무한하지 않다는 정도의 경험도 겪었고, 쾌락의 끝이 허무하다는 것도 알았다. 부초처럼 떠다니는 삶의 기준을 올바로 잡을 방법을 다시 찾는 노력을 하는 중이다.
나중에 내게도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깨달음이 있길 기도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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