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하는 중 생기는 불순종2
‘원죄를 사면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생각과 행위는 불교의 수양과 같은 뜻의 다른 말이다.’ 불순종1에서 내가 쓴 글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다.
마르틴 루터가 "인간이 어떤 선행을 한다거나 자신의 힘으로 죄를 씻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고 깨우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양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수양은 자신의 속에 부처가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깨우쳐 부처의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절대자를 배척하고
자신의 힘(수양)을 강조했다는 것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설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 의인이 되는 과정에는 인위적으로 구원의 과정을 끌어내거나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여 의인이 된다는 것으로 성령이 임하는 조건은 ‘믿음’이외에 인간의 지식이나 욕망의 제어나 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수양은 인위적인 인간의 노력이 전제되는 것으로 성령을 거부하므로 질적으로 다른 내용이라는 것이다.
내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피조물’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자율성이 창조주에 의해 억압받는다는 것으로
잘못 선입견을 가진 것이 이유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창조주는 인간을 만들었지만 우리에게 자유를 빼앗지는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면서
이제는 억압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순응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인 인간이 모든 자유를 다 누리도록 하시면서 단지 하나,
조물주의 권한인 선악의 판단만을 주지 않은 것을 비난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설명에 공감한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면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의인이 되고 이는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본받으려는 행위로 자동으로 연계된다는 칭의론의 설명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면서까지 인간의 죄를 용서했음에도, 인간의 죄성이 소멸되지 않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늘 유지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믿음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를 생각해보면 또 다시 ‘믿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래서 성경을 매일 읽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기를 의지해야 한다. 이런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단지 노력일 뿐이고
그 결실인 ‘믿음’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지만, 어쨌든 인간의 ‘믿음’을 향한 노력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설명이 만약 가능하다면 마음속의 부처를 찾아가는 수양의 과정에서 노력하는 보살이나 처사의 성불의지가 부처를 무시하고
스스로의 힘만을 강조하는 것일까? 라는 반문이 생긴다. 부처를 무시할 수 없고 오히려 부처의 덕으로 성불하려는 보살과 처사들의 노력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것들을 본받으려고 현실에서 노력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불교와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설명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이유이다.
“지금은 아빠가 하는 말이 서너 달 후에는 부끄러울 수 있어.” 작은 딸이 내게 한 충고가
떠오른다. 부끄러워지는 그때까지 열공이다.
'매일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골생활1 (0) | 2018.04.24 |
---|---|
성경공부 중 생기는 불순종3 (0) | 2018.04.23 |
성경공부 중 생기는 불순종1 (0) | 2018.04.20 |
문상(問喪) (0) | 2018.04.19 |
산골, 눈보라, 밤 그리고 상념 (0) | 2016.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