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의 밤, 산골의 눈보라, 산골의 추위 뭐 이런 말은 작가들이 쓴 글에서나 간접 경험을 하곤 했었지. 그런데 어제 내리던 눈보라를 보면서 처음으로 직접 보았지. 바람이 불면 날리는 눈보라는 산골을 휘젓고 다녔어.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스크루지를 끌고 차가운 밤을 여행하던 유령이 지나다니는 것 같았어. 아무것도 모르고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더니, 찬 기운이 나를 쫒아버리더군.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서는 갑작스러운 추위에 놀란 내 코가 콧물을 흘리고, 비염에 의한 재채기가 끝없을 것처럼 이어지더라고. 한참을 코를 풀고 몸을 다시 데우려 힘들었어. 밖의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했어. 눈보라가 일으키는 바람 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고요할 수가 있을까? 나무들만 몸을 떨며 바람의 소리를 듣고 있었어. 창문을 통해 스며나오는 불빛도 아무런 미동도 않고 밖의 눈보라를 지켜보고 있더라고.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하는데....
엉성하게 조립된 사무실의 바깥 현관문은 눈보라에 몸을 떨더라고. 무엇이 날아가는 소리를 내는데 그건 현관문의 소스라치는 몸짓으로 인한 것이지 무엇이 바람에 날아다니는 것은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산골에서는 바람에 날아다니는 것이 별로 없어. 집 마당에 있는 것들은 함부로 나뒹구는 것이 없어. 모두가 농기구 창고나 안 쓰는 옛집 안에 넣어두어서 그렇기도 하고, 상점이 없는 마을에는 간판이라고는 없어. 마을 사업을 위한 이정표는 깊게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흔들릴 리 없고, 산골의 마을은 모든 것이 고박된 듯해. 눈보라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버티는 산골마을은 사람들을 닮았을 거야. 그러나 방안에까지 들리는 눈보라 소리를 들으며, 또 얼마나 외로울까? 누군가를 대상으로 할 이야기도 많은데, 아무도 들어줄 이 없는 이런 겨울밤에는 속의 말들이 방문 틈 사이로 빠져나가 유령처럼 바람을 타고 이웃을 찾아다닐 거야. 어제 싸웠던 표고농장 여자는 다리 잘 뻗고 편안하겠지? 갑자기 드는 생각에 누웠던 몸을 벌떡 세우는 여자도 있을 것이야.
‘직일 년’ 속으로 욕도 하겠지. 눈보라가 윙윙대며 현관을 때리자 아차 싶은 여자는 했던 말을 속으로 숨기고 다시 자리에 누울 것이다.
이 밤, 원주민이라는 권력의 패악질로 멀리 부산으로 쫒아낸 여자가 갑자기 생각이 난다. 누구도 입으로는 욕을 하지 않지만, 눈으로는 ‘자네가 잘못한 거야.’ 질책을 하는 눈이 눈과 함께 부엌을 들이친다. 부엌에서 남편의 술상을 보던 아낙은 갑작스러운 두려움으로 남편의 소주병에서 먼저 한 잔을 부어 마신다. 추운 속이 한 잔의 소주에 따뜻해진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냐. 그 여자가 너무했어.’ 속으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술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여보 술 한 잔 하세요.” 가난한 농부의 집도 눈보라 치는 이 밤에는 풍족하게 보인다. 집 안에는 바람이 없다. 눈도 없다. 단지 천장과 벽에 달라붙어 있는 눈들이 버겁기는 하다.
“같이 한 잔 하지.” 부부가 기울이는 술잔을 보고는 눈들이 슬며시 감는다. 이곳도 프라이버시가 있는 곳은 분명하다. 두 부부의 술잔에 편안하지 않은 외로움과 고독이 살며시 가라앉는다.
사과저장고에서는 사과향이 춤을 춘다. 향수를 만들려고 미인의 체취를 얻기 위해 밤을 헤매던 그가 사과향을 맡았다면 좋았을 것을. 사람을 미치게 하는 향수가 정녕 있을까? 정염에 싸이고, 감정을 이기지 못하게 하는 향수란 것이 과연 있을까? 문득 들어간 저장고에서 나는 향기가 무엇인지 한참을 헤매다 그것이 쌓여있는 사과에서 난다는 것을 알고는 첫경험에 몸을 부르르 떨던 나의 모습에서 어쩌면 밤을 헤매는 향수꾼의 은밀하고도 집요한 집착의 일단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는 것은 나의 착각? 한 잎 베어 문 사과의 식감이 너무나 선정적이다. 베어 먹히며 내는 사과의 소리가 농염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눈보라 때문이리라. 빨간 사과의 옷을 벗기는 소리와 사과의 향연이 눈보라와 어울려 뜨거워지리라. 이 밤 사랑을 나누는 이들에게 축복있으라. 한 입 더 사과를 베어 문다. 눈보라가 회오리치며 사무실 창을 지나간다. 남자 혼자 사과를 베어 무는 모습을 흘깃 본다. 실망의 눈빛을 감추지 않은 채, 사라진다. 산골의 눈보라는 안보는 것 없이 마을을 헤집고 다닌다.
이 밤의 눈보라가 일으키는 상념들은 내일이면 다시 마음의 심연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의 삶에 살짝 영향을 주리라.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그래도 어젯밤의 눈보라에 일어난 상념이 아픈 마음을 조금 더 보듬고 갔으면 좋으련만.... 그저 마음만 휘젓고 간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어제를 잊으려고 다시 고집을 부리고, 싸우고, 패악질을 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다. 밖에는 소리치며 눈보라가 지나간다. 창문을 통해 들리는 것은 그냥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한 폭의 그림이다. 창문의 크기로 보아 100호는 넘는 대형 작품이다. 산골의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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