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
아버지가 떠올랐다.
73살의 아쉬운 나이에 세상을 달리하셨다. 중환자실 침상에서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고통스러웠을 아버지가 기억났다.
의식이 있는지를 의사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곧 돌아가실 것이라고 의사는 확진했다. 나는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냥 운명하실 아버지와 이별을 결심했다. 아내는 반대했다.
“아버지” 내가 부르는 소리에 어떤 반응도 없다.
“이제 몸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않는답니다. 수액을 끊으면 바로 돌아가신다고 해서 끊지도 못해 몸피가 불어났습니다.
아마 다시 건강을 찾지는 못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를 키우고 보호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맘 편히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남은 걱정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남은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이게 아마 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인사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식의 유무를 알 수 없다던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는 의식이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이 장례식장 빈소의 주인 영정에 겹쳐진다.
오늘 또 한 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는 문상을 왔다. 망자는 86세 연세에 세상을 달리 하셨다.
암을 늦게 발견하고 아들은 수술을 고민했다. 그러나 주위의 누이들은 반대했고, 의사들의 협진 결과도 신경과의사만을 제외하고는 수술의 실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수술을 하지 않았다. 아들은 그 결정을 몇 번이나 후회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임종실로 침상을 옮기고 열흘 남짓의 시간동안 아들은 아버지의 침상을 지키며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망자 역시 돌아가시기 사나흘 전부터는 의식이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얽힌 애증의 그림자 속에서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아쉬워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지금 상주로 문상하는 나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보내는 시간을 온전하게 가지는 일이 흔치 않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살이는 우리들에게 일을 하는 시간외에는 온전한 시간을 좀처럼 주지 않는다. 돈을 벌지 못하는 행동들은 무가치한 세상이 되었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가치 없어지는 순간부터 세상의 아들들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욱 소원해진다. 이제 아들들이 바톤을 이어받아 세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은퇴해서 많은 시간을 가진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은 채굴군이 된 아들이 아버지와 가지는 온전한 시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온전한 시간을 오늘 이 상주는 임종하시기 전 약 열흘동안 가지는 행운을 지니고 지금 아버지를 보내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재배 후 상주와 인사를 나누는 절을 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다. 그의 얼굴에 영정으로 웃고 있는 그의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지고, 나의 아버지의 얼굴도 판박이 된다. 그래 세상을 살았다 떠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특수관계로 한정지을 일도 아닌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다.
나는 오늘 내가 태어나기 이전 태어나서 자식을 키우고 희노애락했던 한 사람을 문상했다.
언젠가는 나를 문상할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아버지를 떠올리다 나의 아내와 자식을 떠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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