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출판사 5

최영미 시집, 돼지들에게. 이미출판사

최영미 시집, 돼지들에게. 이미출판사 시란 게, 언어를 갈고닦아 영롱한 빛을 내게 하고, 의미를 욱이고 채워 탁하면 억하고 알아먹어야 함에도 능력이 되지 않아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이해가 될 듯한 시를 만나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따라 하고 싶어지고 말을 붙여 보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반가움을 표시하고, 응원을 하고 싶어서 주접일지도 모를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영혼이 우리가 미워했던 육체를 이기리라(쪽 표시 없는 9쪽) 우리가 사랑했던 육체는 우리가 미워했던 영혼을 고치지 못한다. 누가 누구를 정리했다고? 지금 뒤에서 수근대는, 앞에서 염탐하는 당신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끝나지 않았어. 이건 리허설이야..

매일 에세이 2022.03.26

시 따라 걷는 생각4

시 따라 걷는 생각4 마법의 시간 최영미 시인 사랑의 말은 유치할수록 좋다 유치할수록 진실에 가깝다 기다려찌 어서와찌 만져줘찌 뜨거워찌 행복해찌 유치해지지 못해 충분히 유치해지지 못해 너를 잡지 못했지 너밖에 없찌, 그 말을 못해 너를 보내고 바디버터를 덕지덕지 바른다 너와 내가 함께 했던 마법의 시간으로 돌아가고파 망고와 파파야 즙을 머리에 바르고 올리브오일로 마사지하고 싱그러운 페퍼민트와 장미꽃 향으로 중년의 냄새를 덮고 어미의 병실에서 묻은 기저귀 냄새도 지우고 기다려찌 너밖에 없찌 젊은 날,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러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남들이 “미친 놈”하고 조롱했다. 조롱이 무서워 개그 프로그램에서만 즐겼다. 나 예쁘찌? 나 좋찌? 실실 조롱하듯 웃으면서 속으로는 부러웠다. 그냥 그렇게..

매일 에세이 2021.12.30

시 따라 걷는 생각3

시 따라 걷는 생각 3 꽃들이 먼저 알아 최영미 시인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나지 않을 거야 나비가 날아든다는 난초 화분을 집 안에 들여놓고 우리의 사랑처럼 싱싱한 잎을 보며 그가 말했다 가끔 물만 주면 돼. 물, 에 힘을 주며 그는 푸른 웃음을 뿌렸다 밤마다 나의 깊은 곳에 물을 뿌리고픈 남자와 물이 말라가는 여자의 불편한 동거 꽃가루 날리는 봄과 여름을 보내고 첫눈이 오기 전에 나는 그를 버렸다 아니, 화분을 버렸다 소설을 쓴답시고 정원을 배회하며 화분에 물 주기를 잊어버렸다 꽃들이 더 잘 알아.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난초 화분 옆에서 시들시들 떨어진 꽃잎을 주우며 그가 말했다 얘네들이 더 잘 알아.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시들지 않을 거야 먼저 버..

매일 에세이 2021.12.27

시 따라 걷는 생각2

시 따라 걷는 생각2 시(詩) 최영미 시인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빳빳한 수표가 아니라 손때 꼬깃한 지폐 청소부 아저씨의 땀에 전 남방 호주머니로 비치는 깻잎 같은 만원권 한장의 푸르름 나는 내 시에서 간직하면 좋겠다 퇴근길의 뻑적지근한 매연 가루, 기름칠한 피로 새벽 1시 병원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 반지하 연립의 스탠드 켠 한숨처럼 하늘로 오르지도 땅으로 꺼지지도 못해 그래서 더 아찔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하느님, 부처님 썩지도 않을 고상한 이름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책갈피가 아니라 지친 몸에서 몸으로 거듭나는 아픈 입에서 입으로 깊어지는 노래 절간 뒷간의 면벽한 허무가 아니라 지하철 광고의 한 문장으로 똑떨어지는 고독이 아 니라 사람 사는 밑구녁 후미진 골목마다 범벅한 사연들 끌어안고..

매일 에세이 2021.12.23

시 따라 걷는 생각1

시 따라 걷는 생각 1 선운사에서 최영미 시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꽃이 어디 선운사에서만 피고 지겠습니까. 마음 허전하면 찾아갈 곳이 어디 선운사만 있겠습니까. 하필이면 꽃이 지는 계절,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사람을 얻을 때,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 잊지 못할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씨앗에 숨긴 꽃을 피우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싹이 나면서 들이차는 빗물에 쓸리면서도 약한 뿌리로 버티던 세월 동안의 추억이 알알이 새겨져..

매일 에세이 2021.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