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허구의 삶. 이금이 장편소설. 문학동네 간행.

무주이장 2022. 12. 14. 10:05

모지리 어른들의 폭력에 아이들이 죽어나갑니다.

 

 작가의 말에서 인용합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존중받거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아이는 자라서도 외피만 어른일 뿐 내면엔 상처 가득한 아이가 들어 있는 가엾은 존재다.”

 

 이금이 작가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일 것 같습니다. 부모는 낳고 기른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아이들이 귀하다고 생각하고요. 귀하다는 것은 소중하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고, 소중하니 잘 키우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을 이어도 아이들을 존중했다는 답은 쉽게 나오지 않네요. 존중하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주의를 해야 함에도 부모는 쉽게 말로 상처를 주고, 함부로 행동을 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부모를 이해해서 상처 준 말은 쉽게 잊고, 부모의 잘못된 행동을 쉬이 용서하리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상처받은 그때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굴은 어른인데 성장이 멈춘 아이, 멈춘 성장을 숨기려고 허구의 삶을 사는 아이들은 모두 부모의 잘못입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부인하기에는 증거가 너무나 명백합니다.

 

 아이는 부모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태어납니다. 계획을 세워 아이를 가지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 만든 아이라 그냥 아이가 들어서도 마냥 좋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모든 세상의 부모님은 곤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곤경에 처할 때, 아이가 마냥 좋기만 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모두 아실 것입니다만 그래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놓지 않을 것이 분명한 데도 아이들은 오해를 하기가 쉽습니다. 이럴 경우 부모는 자라지 못한 아이를 성인이 되어서 만나 당황하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부모는 항상 후회하고 용서를 비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구는 몇 살에 죽었을까요? 40대에 맞는 죽음이지만 이것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나이일 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자라지 못한 아이는 나이를 다시 먹으면서 성인이 되었을까요? 상만이 그토록 회피하려던 마음속 어린 자신은 이제는 자랄까요?

 

 아이를 키우면서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후회를 만나게 하고, 아버지로서 잘못한 많은 행동과 말에 대한 반성을 하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간단한 원리임에도 많은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어른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것에 마음이 아픕니다. 이 세상, 어른이라고 스스로 자랑하고 행동하는 많은 모지리 어른들이 오늘도 저지르는 폭력이 너무도 생생합니다. 기사를 쓰는 어른이나 기사에 나오는 어른이나 모지리라는 것을 알면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질 것입니다.

 

 이태원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다시 빕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