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아직 멀었다는 말. 권여선 소설. 문학동네 간행

무주이장 2023. 1. 17. 15:37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을 영화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다며 달려드는 사람을 보는 것이 힘듭니다. 일식집에서 보지만 회를 뜬 살을 뼈만 남은 몸에 올려놓아도 한동안 생선은 입을 벌리며 통증을 못 느끼는 듯합니다. 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도 살이 분리된 체 숨 쉬는 생선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상추로 얼굴을 덮기도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편할까요? 고통은 생존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고통은 위험을 회피하는 수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진화론적 설명은 빼고 다시 묻습니다.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편할까요?

 

 권여선 작가의 소설은 읽기가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우리가 만든 차별, 모욕, 불공정, 부당함, 불평, 불의, 폭력, 야비함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더욱 고통은 배가됩니다. 내가 겪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차별과 모욕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향합니다. 내가 피한 불공정과 부당함은 누군가에게는 족쇄가 되어 스스로 풀 수가 없습니다. 가족사이라 해도 피할 수 없는 야비함은 부조리고 비극입니다. 불편해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 본체 하는 겁니다. 안 보면 없는 것으로 쉽게 믿고 싶지요. 궁지에 빠진 꿩새끼 들도 아닌데 말입니다.

 

 권여선 작가를 슬픔의 마에스트로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슬픔입니다. 고통입니다. 슬픔과 고통을 잘 지휘해서 글을 잘 짓기에 생긴 별명일까요? 문학평론가 백지은이 설명하는 별명의 풀이는 이렇습니다.

이들이 겪는 일이 불행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고난일지라도 그것을 이들 개인에게 속한 불행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들은 불행을 겪는 것이 아니라 부당함을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희라는 외롭고 나약한 인간의 무력함을 안타까워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악행과 악덕이 자연스러운 일부가 된 야비한 세상을 미워해야 하는 이야기이다. 이 인물들이 아픈 것은, 이들이 개별적으로 병에 걸린 환자여서가 아니라 가학적인 환경에 노출된 약자이기 때문이다. 반복건대 권여선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갖가지 고통은 그들 개인에게 귀속되는 불행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할 부당함, 불공정, 불평등이다.”

 

 슬픔의 마에스트로는 슬픔을 공감하라고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슬픔을 만든 우리 모두에게 책임감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슬픔을 지나치게 민감하게 느끼는 작가의 책임감은 얼마나 불편하고 클까요. 슬픔과 고통을 들여다보다 고개 돌려 외면하고 싶은 저는 끝내 슬픔과 고통을 응시하며 이야기를 하는 권 작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불쌍한 사람은 저 같은 사람일 텐데 말입니다. 그의 작품을 다시 찾아 읽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