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하얼빈, 김훈 지음. 문학동네 1

무주이장 2023. 5. 4. 09:40

초라한 먹물들. 지워진 기억 속의 이 씨 왕가

 

 국권을 상실하고 나라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아무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어느 줄에 서야 목숨을 부지하고 나아가 부귀와 영광을 가질 것인지 골몰하였지요. 나라의 임금이 황제가 되었다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붙이는 것도 허황한 짓이었습니다. 만약 임금과 신하들이 겉으로는 힘에 굴복하면서도, 뒤로는 항쟁과 독립을 위한 지원을 했더라면, 국권은 회복이 되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추억으로 그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고, 아관으로 파천을 하는 일들이 무지막지한 일본에 대한 항쟁으로 기록되는 것이 황탄한 말이고 황잡한 말입니다. 말은 시간을 넘어 건너가지 못하고 책 속에서 맴돌 뿐입니다.

 

 소설 하얼빈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토가 죽었다는 소문은 26일 밤중에 장안에 깔렸다. 소문은 소리 없이 퍼져나가서 적막 속에서 술렁거렸다.(…) 헌병대는 전국의 조선인 폭도 준동 지역의 민간인과 배일분자들에 대한 정보 수집을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미세하고 구체적인 정보가 소중하다. 정보를 덧칠하지 말고 날것으로 보고하라. 불온은 고요함 속에 있다.라고 헌병대장은 훈시했다. 조선 팔도는 고요했다. 순종은 그 고요의 바닥이 두려웠는데,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순종은 살길을 생각했다. 조선의 살길과 황실의 살길과 백성의 살길은 겹치고 또 부딪치면서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살길은 슬픔에 있었다. 이토를 죽인 조선인의 범행은 황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황실의 지주이며 황태자의 스승인 이토 공작이 서거한 지극한 슬픔과 그 범인이 극악한 인간말종이라 할지라도 한국 황제의 신민이라는 참담한 두려움을 속히 내외에 공포하고 조선의 슬픔으로 일본의 분노를 위로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살길은 저절로 떠올랐다.

순종은 메이지에게 위로의 전문을 보냈다.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위로를 보냅니다.’(170-171)

 

 지난 정권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소식을 몇 번 들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자 노! 재팬! 운동으로 받아치던 모습도 보았습니다. 일본이 도발하면 우리는 응전한다는 자세였습니다. 누구는 이런 반응을 죽창가를 부른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100년의 세월, 자칭 먹물들은 별로 변화가 없습니다. “정부는 정당한 주장을 하라. 개싸움은 우리가 한다.”는 말이 오히려 먹물들보다 가방끈이 짧을 것으로 짐작되는 국민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민법상의 채권은 채권자의 동의와 채무자의 동의가 없으면 채권인수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채권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채권은 민법상의 채권으로 정부라 할지라도 채권인수를 할 수 없습니다. 일본이 배상하는 것이 잘못을 사과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일본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런 일본에 항의하는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호응한다고 믿습니다.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 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어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는데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것은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외신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한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깨나 쓴다고 하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기껏 몇 미터 떨어진 모니터에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말은 건너가질 못합니다. 대통령의 살길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기는 안다고 눈을 끔뻑거리지만 실은 모른다는 시그널일지도 모릅니다. 끔뻑 끔뻑 초라합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