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권. 강준만 저. 인물과 사상사 간행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막지 못해 남의 나라 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받았고, 수많은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해방과 독립을 우리 손으로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점령군으로 한반도의 절반을 점령한 미군과 해방군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의 북쪽을 차지한 소련군으로 인하여 우리는 주체로서 제반 활동의 제약을 받았습니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후 일본과의 협력을 강조하며 일방적인 양보에 많은 국민들이 경기를 일으킨 것은 굴곡지고 왜곡된 우리의 현대사를 알고 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 치밀하게 계획된 친위쿠데타가 비상계엄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었으나 다행히 국민들과 다수의 국회의원들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비상계엄은 내란이라는 결론입니다. 대통령이란 작자는 의회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발동했다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고 내란의 동조자는 같은 당 의원을 국회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여 계엄해제를 방해하였고, 내란의 부역자들은 자기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대통령 탄핵 결의에 불참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내란 세력들이 진압이 되었다고는 생각되지만 내란 주범과 공범들은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생명까지 잃을 수 있기에 준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불현듯 실패한 현대사의 한 사건이 상기되어 보관하고 있던 책을 꺼냈습니다. 아래의 글은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따옴표는 생략합니다.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좌절
1948년 10월에 구성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관계법과 조직을 정비하여 1949년 1월 5일 중앙청에 사무실을 차리고 반민족 행위자들의 친일행적 조사와 이들에 대한 검거 작업에 착수하였다.
1948년 1월 8일부터 검거작업에 나선 특위는 제1호로 화신 재벌 박흥식을 검거한 데 이어, 일본 헌병 앞잡이로 250여 명의 독립투사를 밀고한 친일파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33인 중 한 사람인 최린, 친일 변호사 이승우, 남작 이풍한, 매일신보 사장 이성근, 친일 경찰 노덕술, 문인 이광수와 최남선을 검거하였다.
반민특위 요인 암살음모의 주동 인물이기도 한 노덕술은 1월 24일에 체포되었는데, 이는 반민특위에 반대했던 대통령 이승만과 반민특위 사이의 갈등을 불거지게 만들었다. 이승만은 특위가 구성될 초창기부터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 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 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라며 반대했었다. 노덕술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노덕술 등은 공산당을 잡는 기술자며, 그들을 처단하려는 것은 공산당의 짓이다”며 석방을 요구하였으며, 2월 2일에는 반민특위를 부인하는 담화를 냈다.
반민특위가 이승만의 요구를 거절하자 이승만은 49년 2월 12일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을 잡아들인 반민특위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며 계속 감시하라고 지령하시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국무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노덕술이 체포된 다음날에 벌어진 사건도 이들의 저항이 얼마나 결사적이었던가 하는 걸 잘 말해주고 있다.
1월 25일 백민태라는 테러리스트가 서울지검을 찾아가 암살 음모사건을 고백했다. 자신이 노덕술을 비롯한 수도경찰청 간부들로부터 반민특위 간부 15명을 38선까지 유인해 살해한 뒤 이들이 월북하려 해 사살했다고 위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백민태는 이들로부터 받은 권총과 수류탄, 그리고 암살 대상자 명단을 내놓았다. 백민태는 전문 테러리스트이긴 했지만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차마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판단해 모든 걸 털어놓은 것이다. 그래도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려는 친일파의 공작은 계속되었다. 이로부터 4개월 후에 나타난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은 213~215쪽을 정리함)
해방 후부터 계속 제기되어 온 친일파 처단 문제는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의원 김웅진의 발의로 다시 본격 논의되기 시작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둘러싸고 공방이 치열했던 8월 26일 국회의원의 숙소와 시내 각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삐라가 살포되었다.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로 순응하라. 민족을 분열하는 반족안을 철회하라. 민족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 인민은 여기에 속지 말고 가면 쓴 의원을 타도하라. 민의를 이반 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인은 지금 뭉쳐야 한다.”
8월 27일엔 2명의 방청객이 국회의사당 안에서 “국회에서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다”라는 삐라를 살포했다. 이런 반발 움직임을 가리켜 독립신보 8월 27일 자는 “친일파들이 발악”한다고 평하였다.
친일파 처단을 둘러싼 갈등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예고된 것이었다. 그간 친일파가 활개 친 것에 대해선 미군정 탓으로 돌릴 수 있었지만, 이제 조선인의 정부를 갖게 된 이상 그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친일파의 아성이라 할 경찰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는 정부 수립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활개 치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친일 경찰 문제에 대해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보낸 9월 1일 자 편지에서 경찰은 미군정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찰 책임자들은 자기들의 견해를 밝히기에 이르렀는데, 자기들이 질서를 유지하여 왔는데, 이제 와서 파직되게 되었다는 것이오. 요약해 본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친일분자가 아니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오. 김성수와 한민당의 모든 다른 지도자들도 일인들과 함께 일하여 돈을 벌었소. 하지 장군 환송연에서 김활란은 국회의원들에게 친일파를 신중히 다루어 달라고 말했소.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모두가 다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오. 그 사람과 임영신도 자기들 학교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했던 것이오.”
그러나 친일파 처단을 간절히 바라는 민심을 외면할 수는 없었기에, 우여곡절 끝에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었다. 명분에 밀려 반민법을 공포하긴 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반민법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반민법에 근거하여 국회 내에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반민특위는 그해 10월 23일 각 시.도 출신 국회의원들이 추천한 임기 2년의 위원 10명을 선출하고, 위원장에 경상북도 대표인 김상덕을, 부위원장에 서울 대표 김상돈을 뽑았다.
반민법 제정이 ‘국회 안에 있는 공산당 프락치의 소행’이라는 주장은 8개월 후에 터질 ‘국회 프락치 사건’을 내다본 무서운 예견력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이때부터 그 사건을 조작해 내기 위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던 것일까? (이상 155~160쪽을 정리함)
좌절된 현대사를 돌아보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친일파들을 척결하지 못한 역사는 군인들의 쿠데타와 연결되고 성공한 쿠데타는 또다시 역사에서 반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4년 윤석열이 다시 시도했습니다. 아직은 내란이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란이 종결되고 공범들과 부역자들을 모두 처벌할 때까지는 우리 모두 호랑이의 눈으로 지켜보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래서 실패와 좌절의 현대사를 2024년 오늘, 극복한 역사를 기록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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