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에세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소설. 문학동네 간행

무주이장 2024. 12. 13. 12:03

 하나의 사실에 대한 단 하나의 이해와 서술이 불가능하리라는 회의, 숨어 있는 진실을 위해 거듭 반성해야 한다는 권고, 현실은 되풀이될 수 없듯이 결코 재현될 수도 없다는 관점이 김연수의 작가적 인식에 깊숙이 미만(未滿 彌滿은 뜻이 반대입니다) 해 있어 작품 곳곳에서 모티프로 작용하고 사건에 대한 서술자의 의식으로도 풀려나가며 그의 서두 도입부 수법과 함께 여러 방법론으로 확산되고 있다.” (296, 김병익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이야기가 소설이지요? 이야기라면 재미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작가의 이야기는 읽기에 불편해요. 불편하니 이야기도 재미가 없지요. 그런데 재미가 없다고 하기에도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어요. 제가 미욱하니 어디서 왜 어떻게, 명확하지 않지만 땅거미처럼 드리우는 어둡고 불편한 느낌의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다 작가의 이야기를 다 읽은 후 김병익의 해설을 보면서 바보 도 통하 듯, 체한 듯 답답했던 마음이 뚫렸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보고 싶은 면과 작가가 드러내는 사실의 면면들이 달랐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혼하고 헤어진 여인과 우연히 만나 걸었던 서울의 골목길을 복기하듯 다시 걸으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생각하는 그, 재미없는 사람이 하는 농담이라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서울 지리를 모르는 제 입장에서는 농담도 아닙니다. 나무를 중심으로 걸었다는 그의 주장에 만났다 헤어진 여인은 동의할까요? “나는 우산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선 백송을 올려다봤다. 하나의 가지는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향해, 또하나의 가지는 한강이 있는 남쪽을 향해 서로 갈라져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31) 마음이 갈라져 살았지만 한 몸처럼 살았던 부부를 일컫는 농담일까요? 이 이야기의 제목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입니다. 카페에서 차나 마시며 서로 떨어져 지낸 세월 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하지 않고 걸었던 여자의 이야기는 분명 나무 한 그루에 대한 얘기에서 시작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같이 걷던 발길을 멈추고 손을 잡고 골목길 그늘에서 안아주고 입 맞추지 못했던 골목 이야기로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그녀를 잊었습니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작가는 긍정하지 않는다고 김병익은 해설합니다. “말이나 글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라 몸으로 겪은 삶을 살아본 사람만이 진실을 이해하고 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으며 그래서 삶과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라며 작가의 근원적인 부정이 절망적으로 언표 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해설에 근거하면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뿌넝쉬라는 제목을 달고 작가가 하는 이야기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니가 뭔데 그 사람을 살아보지도 못한 주제에 그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이야 웅변을 하는 듯합니다. 충분히 이해는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불만이 벌떡 일어나려 합니다. “맞는 말을 참 싸가지없게 했”던 젊은 시절 유시민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유시민을 좋아합니다. 작가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판결문에서 자주 보이는 말이 생각납니다. “일견 사실로 보입니다

 

 변 부사가 아전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기생 점고를 하던 중 춘향이가 오지 않을 것을 핑계로 옥고를 치르게 된 춘향 이야기는 춘향이 주인공이 아니라 변 부사와 지방 아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 연인이 왜 자살하였는지 모른 채 낭가파르바트 원정을 간 사람이 들려준 왕오천축국전에 빠진 글자에 대한 설명, 그가 썼다는 소설도 관심이 가질 않았습니다. 단지 그도 낭가파르바트에서 실종이 되었다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혼돈이 혼돈으로 끝나는 세상에 대하여 눈이 언뜻 갔습니다. 나이 헛먹은 것 같은 허탈함이 있습니다. 권력을 쥐고 세상을 호령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장삼이사가 가소롭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그렇게 사는 게지요. 그런데 작가 김연수는 그렇게 살지 않는가 봅니다. 하여간 작가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 불편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합니다. 작품으로 말하는 작가가 그래도 전 좋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정인을 구하려 마음에도 없는 구호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인민재판에서 죽는 꼴이 눈 시려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칩니다. 수복 후 정부는 그녀를 부역자로 처단합니다. (처단은 분명 죽음을 뜻합니다. 이번에 의사들 간담이 서늘했을 겁니다) 그녀는 정말 부역자일까요? 일도양단의 근거가 처량합니다.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

 

 김병익의 해설에 동의를 하던 그렇지 않던 세상을 보는 눈에는 하나의 렌즈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건 어떤 작가의 글에서 읽은 것도 아니고 역사를 배워서도 아닙니다. 그건 분명히 제가 겪고 알아챈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 깃발을 흔들며 목청껏 외치는 우리들의 동료 늙은이들을 용납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들의 신념이 몸으로 겪으며 체득한 것이길 바랄 뿐입니다. 어떤 미친 녀석처럼 유튜브에서 들은 것으로 신념인 척 칠갑을 하는 꼴이 보기 싫을 뿐입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이렇게 생각이 많아지고 저도 몰래 신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요. 선택과 집중은 중요합니다.

 

 작가는 로만 구성된 이야기책을 한 권 쓰고 싶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든다 (310)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의 체취가 그리워서 잠도 안 온다며 자기는 이제 가 빠져 지금부터는 유령작가가 됐다고 합니다. 사람이란 게 다 그런 게지요. 자기 얘기만 하다보면 그 얘기가 거짓말이라고 다른 사람이 딴지를 걸지요. 이 작가 대단합니다. 자기 얘기를 스스로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거짓말 아닌 이야기가 없는 세상이 좋을 걸까요? 그렇지 않을 걸까요? 김병익 문학평론가에게 도움을 많이 받아 간신히 읽었습니다.

예스24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