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서 치매 환자의 소식을 자주 듣게 되어 동네 도서관에서 치매에 관한 책들을 검색했습니다. 아내에게도 권하고 저도 읽습니다. 그러다 찾은 책이 ‘들꽃, 치매를 앓다’입니다. 처음 알게 된 시인입니다. 제 마음에 드는 시도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시도 있었습니다. 예스 24에서 검색했더니 서평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시집의 제목인 시부터 소개합니다.
들꽃, 치매를 앓다
완성과 미완성 사이를 넘나들며
다시 새봄을 꿈꾸는 것은
부르주아식 최후의 만찬인지도 모른다
방향 잃고 아직도 귀가하지 못하는 만신창이
몸부림처럼 시시때때로 울고 웃으며
꽃밭을 거니는 꿈 밤마다 꾸고 있지만
그것은 방황과 혼돈의 목마름일 뿐이다
외로움보다 더 외로운 여인의,
귀가를 무작정 기다리는
어느 무지렁이의 서성임보다
더 쓸쓸하고 애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기다림의 그림자 자꾸만 길어지고
열망은 다가오지 않을 작정을 하고 있는가
그래도 한가닥 남은 끈 잡아 본다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공 드린 습작의 나날은
또 다른 진심을 아리게 한다
새로운 꿈이 미완을 지울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이별은 준비하지 않으리
오지 않겠다며 소리 지르는 당신을 위해
애증의 노래는 부르지 않으리
비굴하다고 손가락질할까 아니,
내가 진정 독해지는 게 아닐까
망각의 강물이 당신의 천진한 습기로
채워지고 있을지 몰라
기약 없는 언약보다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못할 당신일지언정
기다림에 익숙해진 나를 위해
들꽃처럼 다시 피어나 주었으면…
치매를 앓고 있는 들꽃에게 하는 다짐인 것도 같습니다만 시정을 포용할 마음도 감정도 지적 능력도 잼병인 관계로 그냥 안타까움만 느끼고 맙니다. 나의 들꽃은 부디 치매를 앓지 마시길 기도합니다.
저수지
자기 몸통보다큰
산등성이를 덥석 물고 마치,
대어라도 낚은 태공처럼
희색이 만연하다. (산등성이 옆 저수지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무너미 옆으로 내려온 하늘빛
언제부턴가 외발로 누르고
해탈을 꿈꾸며 무상에 잠겨 있는 두루미 한 마리 (저수지에 발을 드리운 두루미가 보입니다)
자맥질하던 왕잠자리 포르르
허공으로 빨려 들면
기다렸다는 듯
수면을 핥고 지나가는 녹색 바람 (한 여름의 저수지 풍경이 그대로 그려집니다. 더위보다는 시원한 바람이 보입니다. 저수지 물과 녹색 바람의 이미지입니다)
녹색은 주름치마를 펼치며
무성한 풀숲으로 파고들고
보는 이 아무도 없는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잉어의 서커스가
한낮의 고요를 깨운다 (잉어가 뛰는 소리가 그대로 들립니다)
길 떠나던 뭉게구름이 가던 길을 멈추고
입바른 소리 한마디 한다
“늦바람이 더 무서운 게야” (잉어가 무슨 죄가 있길래 늦바람을 피웠다고 질책할까? 아마도 시인의 마음에 늦바람이 든 게야)
풍경화를 보는 듯한 시가 좋습니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 생각났습니다. 전 이런 시가 좋습니다. 그런데…
평화의 댐에서
여기
슬픔을 아로새긴 푸른 산 깊은 골
초연의 냄새 가슴마다 품어 안고
잠들어 있는 통한의 눈물
비가 되어 흐른다. (어떤 댐이냐 묻지 않고 다짜고짜 읽어내는 풍경이 좋습니다 조금 심각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다음 연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날
까만 눈동자의 겁먹은 소년이
세월의 강을 건너 그대들 앞에
뭉쳤던 응어리 눈물로 삭이며
한 치 한 치 쌓아 올린 침묵을 바라본다 (이제 이름만 ‘평화’인 댐에 평화를 파괴한 자들에 의해 강요된 침묵이 등장합니다. 시가 조금 심각해졌습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가
까맣게 말라버린 전상의 잔해들
누구라 할 것 없이
불게 타오르는 통일의 노래 (이제 침묵을 깨고 부르는 노래는 '통일의 노래'입니다. 심각이 더욱 고조되고 점증됩니다. 다음은 심각이 의지가 되어 불타오를 것 같습니다)
역류하는 터널을 지나
죽어도 죽지 않는 그 이름
아직도 향기롭다 (통일을 외치며 죽은 자들을 되살리며 피우는 향내가 짙습니다)
70년 전 그대로 박제된 시간이
허공 가득 흩어질 때
아까부터 젖은 비목을 맴돌며
유월의 넋을 불러대는 까마귀 한 쌍 (심각에 감성 한 숟갈 얹습니다)
한쪽 날개를 잃은 비둘기가
평화의 종, 유월을 흔들어 깨운다 (유월 아마도 전쟁기념일 즈음에 들렀던 곳인가 봅니다 때를 알리는 정보, 때는 6월입니다)
북한의 수공으로 인하여 서울이 물바다가 되어 도시가 마비된다는 우려에 어린아이부터 등 굽은 노인들의 호주머니를 탈탈 틀어 만든 댐이 ‘평화의 댐’입니다. 며칠 동안 줄지어 성금이 답지하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곧이어 알려진 소식은 북한이 수공을 가해도 결코 서울이 물바다가 되지 않는다는 ‘가짜뉴스’였습니다. 시인은 이런 소식에는 아랑곳없이 시정을 흘리고 오셨습니다. “내 누이 같은” 국화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분도 일본 제국주의가 영원히 우리를 지배할 것으로 예상하셨겠지요. 이번 비상계엄에 가담했던 모든 분들이 늙을 때까지 편안히 잘 먹고 잘 살다가 말년 즈음 감옥으로 가는 모습은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즉시 처벌을 받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비상계엄을 찬양하는 시정이 늙은 시인들을 위주로 한남동과 광화문에서 줄줄 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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