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태어난 한강 작가가 1993년 10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쓴 작품을 모은 소설집입니다. 작가 나이 20대 초반의 글입니다. 2014년 40대의 작가는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가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가 있는가? 질문에 답을 찾아 이야기를 찾았고 ‘소년이 온다’를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2024년 작가 50대에 노벨문학상이 찾아옵니다. 노벨상이 가진 힘 때문이 아니라 작가의 이야기는 세계인의 공감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이야기임을 증명했습니다. 묵은 우리의 역사 속이 아니라 2024년 느닷없이 다가온 ‘비상계엄’에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음”을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음”을 지금, 현재 대한민국 서울 여의도에서 확인을 했습니다. 작가의 성찰은 오늘 더욱 빛을 더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잇기 어려워할 때 읽었다는 야학교사의 일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일기를 읽으면서 교사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야학교사의 운명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감수성이 예민하여 글을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가온 아픔을 극복하고 작가가 글을 쓸 수 있었던 힘의 싹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제가 ‘여수의 사랑’을 읽은 이유입니다.
모두 6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었습니다. 하나같이 아픈 이야기들입니다. 아픈 사람은 다른 아픈 사람에게 끌리지만 아픔으로 인하여 관계의 지속이 어렵습니다. 세상과는 격리된 자는 타인의 도움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며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아니 죽어갑니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물이 흐르듯 거침없이 진행되고, 가슴은 막막합니다. 가슴이 터일 해법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직시하는 것에 서툴지만 남의 아픔에는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듯 남의 아픔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합니다. 위로를 주는 존재일 수도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20대 작가의 고민은 어떤 해결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20대의 눈에 뚜렷이 보였든 고통을 해소할 방법은 도무지 방도가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픔을 느끼는 센서는 너무도 정밀합니다. 너무나 정밀하기에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듯한 이 이야기의 해법은 무엇일까요?
문학평론가 강계숙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예민한 감수성의 젊은이들은 ~ 세대적 감성으로든, 집단적 무의식으로든, 젊은 축들은 문화적. 사회적 죽음이라 칭할 만한 국면을 동시대적 사건으로 맞닥뜨렸던 것이다. ~ 이제 와 보니 ‘여수의 사랑’은, 그리고 이 시기의 한강은 당시의 어떤 소설가보다도 이러한 동시대, 동세대의 망탈리테(심성)에 강하게 공명하며 육박하였고, 타고난 감응력으로 죽음이 난무를 추던 시의 통증을 소설적 버전으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작가가 살았던 시대의 암울함에서 “목숨은 끊기지 않은 채 죽음을 거느리고 살아야 하는 영혼의 황폐함이 어떤 삶의 형태를 낳는가에 작가는 더 주목한다. 죽음 자체, 혹은 그것의 현현이 아니라 삶에 미치는 죽음의 지속적 파장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병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내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마치 주어진 운명의 수락을 조용히 거부하는 수난자처럼 자기 몫의 고통을 지고 회귀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들이 앓는 병이야말로 삶에의 의지를 대신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강계숙의 도움을 받을수록 갑갑함이 더 명료합니다.
삶의 의지를 표현하는 방법이 도무지 요령부득 같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살아낼까요? 강계숙에게 다시 도움을 받습니다. “우리에겐 젊은 영혼들의 이 길고 지루한 도정이 값지기만 하다. ‘여수의 사랑’이 삶의 대립쌍이 죽음이고, 죽음 곁에 있는 삶이란 사랑의 상실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짐 지는 일이며, 상처는 죽음을 동반하는 ‘되태어나기’를 강요하기에 가장 두려운 적이자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되삶’의 가치란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심원하고 도저한 정신의 층위에서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 ‘여수의 사랑’은 그러한 역설의 진실을 소설의 진정한 육체로서 실현한 우리 시대의 가장 젊은 ‘고전’이다. ”
작가의 젊은 시절, 삶을 보는 시각을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힘듦이 있어 작가의 감수성은 더욱 예리하게 날이 벼려졌을지도 모릅니다. 1990년대를 30대로 살았던 저의 기억도 그리 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처로 사랑을 상실하고 죽음을 동반하는 ‘되삶’을 인식하지는 않았습니다. 20대의 작가의 모습에서 ‘상처와 죽음’을 보았고 오늘 작가의 모습에서 ‘되삶’을 볼 수 있어 감사합니다. 감사하는 이유는 강계숙의 “젊은 고전"이란 칭찬 때문은 아닙니다. 마지막 칭찬은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도움을 받은 자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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