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만리, 겨울새
구만리의 집들은 지붕이 낮다. 눈이 내리면 어깨까지 굽어서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인다. 그만 작은 산봉우리가 될 것처럼, 부끄러운 듯 눈 아래 가만히 세속을 감춘다. 새 한마리가 가끔 손님으로 찾아와 작은 흔적을 남기며 처마 밑에 머문다. (겨울새 중에서)
금곡동 공창부락의 지붕도 낮았습니다. 기와를 얹은 경우가 아니면 격년에 한번 초가지붕을 새로 엮었습니다. 어른들이 힘을 모아 같이 작업을 하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튼실한 어른이 살았던 집이나 그랬겠지요. 어른 없는 집은 행여 비 샐까 맘이 까맣게 타 들어가듯 초가지붕도 까매졌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키가 크지 않았지만 여름 저녁에 후라쉬 하나 들고 굴뚝새를 잡으러 돌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초가지붕이 낡은 집 처마에는 굴뚝새가 집을 짓고 단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 집에 보안사 대원 들이닥치듯 후라쉬에 불을 켜고 작은 구멍에 들이대면 자던 새가 놀라 꼼짝 못 한 채 들이닥치는 손아귀에 포획되곤 했습니다. 따로 사다리를 대지 않아도 되었던 것으로 봐서 공창부락의 지붕은 낮았습니다.
아이들과 마을 옆 동산에서 놀다가 밥 짓는 연기가 굴뚝에서 나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파란 잔디가 깔린 동산에서 바라본 마을의 지붕들은 낮았습니다. 낮은 집 굴뚝에서 나오는 밥 하는 연기는 멀리 퍼지지도 못하고 마을에서 저녁상을 기다렸습니다. 지금 그 낮았던 집들은 경부선 철로 옆 마을이라는 이유로 지붕개량 사업을 했고, 도시가 확산되면서 월세를 받을 빌라들로 몸피를 불렸습니다. 지붕 높아진 것은 물어 무삼 하겠습니까.
아픈 기억, 뼈들
함께 구름을 보았을 것이지만 기억이 다른 뼈들이
때론 자운영 피웠을 언덕에서
떡갈나무 묵은 나뭇잎 덮고 누웠을 언덕에서
남은 뼈들이 구덩이를 빠져나와 흘러 계곡에서
어른도 아닌, 남자도 아닌, 빨갱이도 아닌
죽어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렇게요
다행히 그동안 몇번 큰비가 내렸던 거죠 (뼈들 중에서)
방방곡곡 어디든 슬픈 기억이 없는 산천이 있겠습니까? 이념이 뿜는 독기로 서로를 죽이던 마을도 있고, 가난이 부른 비극도 여기저기 도처에 있습니다. 함께 구름을 보았지만 기억이 다른 사람들이 언덕을 빠져나온 것은 큰비가 내린 때문입니다. 맺힌 한을 씻겨주는 비라도 되었으면 좋겠지만 어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빨갱이도 아닌 마음 말간 사람들의 한을 보면 그저 지금 뼈라도 찾은 것에 다행이라고 맥없는 소리를 합니다.
금곡동 공창부락은 제삿날이 같은 집이 제법 많습니다. 아비가 일을 나갔다가 변을 당했으면 제삿밥이라도 아내가 옹골차게 마련해 죽어서나마 배부르게 멕이기라도 하겠지만 몇 푼 벌겠다고 배를 타고 강 건너 김해 너른 밭에 일을 나갔다가 차오르는 물을 퍼다 퍼다 지쳐 배와 함께 낙동강에서 이승을 떠난 아낙들의 제삿날이라 제사상이 부실합니다. 누군 살아 옷 한 벌도 못해줬다며 죽어 옷 한 벌 해 입혔다는 노랫말이라도 있지만 무심한 남자들이라 산 입 거두느라 아마도 잿밥은 가장의 남루한 옷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물 새는 배가 여사였던 가난한 시절의 아픈 기억입니다. 억울하기는 물론 큰비에 세상에 나온 뼈들의 주인만큼이야 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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