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범죄 서사의 소멸: 범죄 영화가 재미없어진 이유
작가는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소개하면서 탐정 에르퀼 푸아로를 소개합니다. "에르퀼을 만나면 범죄는 즐거운 사건이 된다. 술술 풀리기 때문이다. 범인이 누구였는가를 밝혀내기 때문이 아니라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파악하고, 분석하고, 규정할 때 마침내 범죄는 정복된다. ‘왜’가 밝혀진다는 것은 범죄의 인과관계가 해부되었음을 뜻하고 해부된 범죄는 공포력을 잃는다. 공포력을 잃었으니 범죄가 즐거운 사건이 된다"
이 설명은 공포영화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출현하는 귀신은 즐거운 사건이 된다. 귀신이 누구냐를 밝히기 때문이 아니라 왜 귀신이 되었고 나타나는지를 파악하고, 분석하고, 규정할 때 마침내 공포는 정복된다. ‘왜’가 밝혀진다는 것은 귀신의 신원과 출현, 사연의 인과관계가 해부되었음을 뜻하고 해부된 범죄는 공포력을 잃는다. 공포력을 잃었으니 귀신 영화가 즐거운 사건이 된다"
그런데 2023년, 어느덧 세상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범죄들이 너무나도 많아졌습니다. 작가는 이 글을 2017년에 썼습니다. 그때도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지금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지요. 남편을 가스라이팅하여 정부와 함께 물에 빠뜨려 죽이고 천연덕스럽게 먹을 것 먹고 보험금을 청구하는 범인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는 소리가 역시 천연덕스럽습니다. 아무나 잡히는 대로 성폭행을 할 것이라고 작정하고는 산책 중인 힘없는 여자를 상대로 범행을 합니다. 죽도록 때리고는 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겠다는 말을 버젓이 합니다. 작가는 에르퀼이 나와 범죄를 해결하던 시절이야말로 어쩌면 인류의 좋았던 시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더 이상 범죄 영화를 큐브나 퍼즐을 맞추듯 심심풀이로 볼 수 없는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이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상해를 입히고 살인을 합니다. ‘왜’가 없습니다. ‘묻지 마 폭행, 묻지 마 살인’이라고 부르지요. 이제 에르퀼도 탐정 셜록 홈스도 맥을 못 추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범행의 동기, 이유를 찾기보다는 CCTV를 봅니다. 말 한마디 없는 사람들이 화면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황급히 도망을 가고, 형사는 말없이 화면을 이어 추적합니다. 세상이 바뀌니 귀신도 아무나 괴롭힙니다. 원한관계를 묻지 않고 괴롭힙니다. 귀신영화도 심심풀이로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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