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군대에서 자라는 머리카락
사족처럼 부연할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과거 군대는 폭력이 난무했습니다(영화 D.P.를 보면 아직도 군대 내 폭력이 근절되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습니다). 선임이라는 이유로 별 이유도 없이 후임을 괴롭히는 일이 밥 먹듯 자주 일어났습니다. ‘얼 차렷’이라고도 불렀지만 폭력일 뿐입니다. 소대 내 가장 높은 선임은 중간 후임에게 막졸들이 얼이 빠졌다고 갈구고, 중간 선임은 후임들을 연이어 갈구는 구조입니다. 중간 선임은 폭력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선임자가 갈궈도 나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면 본인이 모든 폭력의 피해자 역할을 감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빠졌다고 해서 소대 내의 폭력은 근절되지 않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역할을 이어받아야만 하는 구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막졸 시절부터 받은 폭력에 대한 앙갚음에서 자유로운 선임도 찾기 힘듭니다.
제가 제대를 하고 만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대에서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선임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그가 선임이 되자 그는 중간 후임과 막내 병사들에게 우리 소대에서는 더 이상의 폭력이 없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던 병사들이 선임이 솔선하여 폭력을 사용하지 않자 점점 믿기 시작했고, 드디어는 많이 자유로운 막사 생활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각 병사가 자기 기수에 맞게 기존에 맡겨졌던 업무가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간 후임에게 업무지시를 하자 중간 후임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후임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훈계 대신 ‘얼 차렷’을 시행해야 한다는 불만이었다고 합니다. 결론은 무엇일까요? 선임은 중간 후임들에게 ‘빳다’를 쳤고 중간 후임은 연이어 후임들에게 더 심한 ‘빳다’를 쳤다고 합니다.
전우용 선생이 지적한 말이 기억났습니다. “때리지 않는 선생에게 달려드는 양아치”들이 문제일까요? 결심을 포기하고 폭력을 행사한 선임이 문제일까요? 폭력을 없애려던 선임의 입장에서는 정을 주고는 받은 것은 배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사 모두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님에게 묻습니다. “베푸는 것에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섭섭함, 배신 그리고 원한이 생기니 베풀 때는 애초 보상을 기대하지 마라”는 대답입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정보라 작가의 씨앗이 머리카락이 되고, 서울살이의 특권이 되고, 군대 내 폭력까지 자랐습니다. 누군가는 다시 머리카락을 씻기고 땋고 자르는 일을 시작하길 기대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머리카락이 왕초가 되면 피곤함을 넘어 생존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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