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의 단편소설 ‘완전한 행복’ 속의 완전한 행복론 고찰
소설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가상과 허구와 상상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것들이 근본적으로 같다고 주장하지요. 작가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재미있으면 된다고 저도 믿습니다. 작가는 자기의 이야기에는 교훈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독자에게 교훈 같은 걸 줄 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 증거로 “한때 뭘 아주 잘 몰랐던 사람이고, 지금도 별로 뭘 잘 아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그럼에도 노력은 하고 있다고 하지만, 알려고 노력한다는 말인지, 교훈을 주려고 노력을 한다는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노력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지식이 늘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작가의 소신인 듯, 교훈인듯한 작가의 행복론을 얼핏 본 것 같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 나름의 노력의 증표라고 믿습니다. 일명 ‘완전한 행복론’이 되겠습니다.
1 설입니다. “하나님은 선이며 자비이시다. 내가 용서했듯이 너도 용서해라.” 하나님을 본받아 용서하고 하나님의 선과 자비를 알게 되면 행복해진다는 설입니다. 이 설은 대단히 강하고 유연하고 다양한 성격을 지닌 하나님에게 기대어 용서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행복을 이끈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백이 든든한 설이기는 하지만, 그에 반해 이 설의 약점은 하나님은 선이라는 중동의 철학과 종교적 신념을 나타내는 개념의 단어와 동양의 철학과 종교적 신념을 표현한 자비라는 단어가 혼합되어 주장이 혼잡성을 띠면서 개념의 혼돈으로 인하여 주장이 명료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질적인 종교의 순수성을 무시하고 쉽게 단어를 섞어 사용하여 이질적 종교의 독립성을 훼손한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2 설은 1 설과 다른 주장입니다. “용서는 잘못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잘못이 있음에도 자각하지 못하여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용서할 방법이 없다.” 선이나 자비는 자기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필요한 것은 용서가 아니라 정의라고 주장하는 설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나아가 자기의 잘못을 정치적, 종교적 신념이라고 강변하고 견강부회하는 사람들을 처단하는 정의의 실현이 완전한 행복을 얻는 방법이라는 주장입니다. 정의의 실현은 비현실적으로 잔인하거나(저자는 자기의 주장을 버무려 만든 이야기 속에서 머리를 도끼로 찍고, 사지를 찢어 늑대 먹이로 만드는 잔혹한 행위조차 용인합니다) 함부라비 법전에 실린 방식처럼 받은 대로 갚아주는 것도 허용되는 것으로 주장합니다.
다른 주장으로 1 설과 2 설의 주장을 합친 절충설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때로는 용서를, 다른 때에는 정의를 부르짖으며 행복을 주장하는 자가 사는 시대와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달라요”를 주된 근거로 삼아 주장하는 행복론이라 주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처세술로 보여 여기서 정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교훈을 주지 못하는 작가가 지어낸 가상과 허구와 상상의 산물인 이야기를 읽고서 제가 지어낸 ‘완전한 행복론’ 같이 느끼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디 세상 행복론이 굳이 현실적이어야 할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행복은 현실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두뇌에서 내는 도파민이나 엔드로핀, 옥시토신 같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외국말에서 유래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어쨌든 행복하자는 말로 마무리를 억지로 하려고 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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